자취생활의 자취

한겨레 2022. 12. 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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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의 사사로운 사전]

게티이미지뱅크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여태껏 부모님 밑에서 살다가 방을 얻어 독립한지 1년이 다 돼간다. 자취를 시작하며 가장 놀랐던 것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식품의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짧다는 점이었다. 아무 근거 없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공장에서 만든 것이니 일년은 거뜬히 갈 줄 알았건만. 우유에 말아 먹을 수 있는 과자는 아침 대용으로 먹겠다고 두박스를 샀으나, 한박스는 손도 대지 못한 채 기한이 지나버렸다. 처음에는 식품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경험치가 없어서 기한이 지난 즉시 버렸는데 지금은 곰팡이만 피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먹어치우는 편이다. 두부는 석달이 지난 것도 먹는데 진공포장돼 있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자취 경험이 많은 친구는 ‘뭐든 국물만 생기지 않는다면 먹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다.

불과 일주일 전 본가에 내려가 김치 세포기를 얻어왔는데, 엄마가 김장했다며 새로운 김치를 또 한상자 가득 보내주셨다. 김치가 주재료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이스박스를 뜯는 순간 너무나 많은 김치 양에 신음하다가 냉장고를 열고는 두통에 시달렸다. 이 많은 김치를 어떻게 처리하지? 알고 지내는 이웃 하나 없이 무작정 시작한 서울생활. 나눠줄 사람도 없으니 오롯이 내가 먹어치워야만 하는 김치들. 고민하다 편의점에서 칼국수 4개입 세트를 하나 샀다. 하루에 한끼는 김치를 몽땅 썰어 넣은 칼국수를 끓여 먹어서라도 소비할 참으로.

다용도실에 쟁여둔 양파는 어느새 싹이 났는데, 싹 난 감자가 아닌 싹 난 양파의 위험성 같은 건 들어본 적 없어서 먹어도 되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고, 이모가 보내주신 마늘은 곰팡이인지 뭔지 모를 그림자가 스며들더니 이내 대부분이 바스러지거나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엄마가 가르쳐주신 대로 보관했을 뿐인데 왜 본가 마늘은 멀쩡하고 우리 집 마늘은 잽싸게 흙으로 돌아가 버리는가? 냉장고에 넣기 무섭게 상해버리는 상추와 깻잎, 쪽파는 사지 않은지 오래됐다. 그나마 껍질이 단단한 고추는 꽤 오랜 시일 잔존해줘, 매 밥상에 고추를 올리는 자취생이 돼버렸다. 아, 나의 자취 로망은 이게 아니었는데. 대용량 채소를 산 뒤 소분해 보관하는 법이나 밥 짓는 법, 설거지 제대로 하는 법, 가스레인지 닦는 법…. 괜찮은 모습으로 삶을 영유하기 위해선 너무나도 많은 지혜가 필요했다. 삶이라는 과정 앞에서 나의 실질적인 학력은 참 볼품없었다.

자취는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自炊)’이란 뜻이지만, ‘어떤 것이 남긴 표시나 자리’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자 집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의 자취를 느낀다. 중고로 산 냉장고는 어딘가 고장이 났는지 넣는 족족 식품이 상했다. 돈이 생기면, 무엇보다 내 집이 생기면 좋은 냉장고를 하나 사고 싶다. 독립하기 전 엄마에게 김치냉장고 한대를 선물로 사드렸는데, 김치를 꺼내 먹을 때마다 엄마는 나의 자취를 느끼고 계시려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원초적인 상태 그대로 쉴 수 있는 나의 집은 다정하기 그지없으나, 조금만 시선을 고정하면 매일 청소기를 돌렸음에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과, 지난주 락스 청소를 했음에도 어느새 끼어있는 화장실 곰팡이와, 부지런히 먹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상해버린 자투리 채소들과 눈이 마주쳐 이내 괴로워진다. 자취란 어쩌면 물건과 식품의 자취를 잘 정돈하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생활비를 아껴 산 삼겹살은 벌써 자취를 감췄지만, 식단 관리를 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사뒀던 닭가슴살은 냉동실 가득 자리를 차지한 채 기세가 든든하다. 출퇴근길 입었던 외투를 건조대에 걸어 하루간 묵은 피로의 냄새를 날려 보내고 자취방에 누워본다. 매일을 잘 마무리하는 게 참 고단한 일이다. 우리집 김치는 언제쯤 자취를 감출까? 조만간 김치전 파티를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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