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잣집 풍경을 그리는 정영주 작가

서울문화사 입력 2022. 12.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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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힘들 때 떠올리면 힘이 나는 풍경이 있다. 돌아가면 언제든 문을 열고 맞아줄 것 같은 따스한 고향 동네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반짝반짝 켜진 불빛까지, 정영주 작가가 그려내는 따뜻한 풍경 속에서 찾은 빛과 희망.

정영주(197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회화과를 졸업했다. 판잣집들이 가득한 산동네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도시 풍경’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 어둠이 내린 마을의 골목 곳곳을 환히 밝혀주는 불빛들을 통해 추억과 향수를, 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았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여 집의 형태를 조각하고, 그 위에 여러 번 덧칠해서 완성하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정영주 작가만의 깊이를 완성했다. 프랑스 베르사유 질베르 조제프 서점, 영국 런던 알베말 갤러리, 서울 학고재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홍콩 하버시티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따스한 골목의 풍경을 그리는 정영주 작가와 그의 연희동 작업실을 찾은 마크 테토. 작업실은 당구장이 있던 자리로, 작가의 작품들이 내뿜는 온기가 공간을 채운다.
캔버스 위에 젖은 종이를 붙이고 나이프로 조각하는 과정을 거치며 정영주 작가만의 독특한 화풍이 완성된다.

 

가지런히 정리된 작업 도구들.

종이조각 하나하나를 붙여서 집을 만들고, 그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정영주 작가의 ‘도시 풍경’ 시리즈는 과거의 추억을 머금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만든 커다란 세계로, 지금의 정영주 작가를 있게 한 작품이다. 등불들이 어두운 골목을 밝히는 끝없이 펼쳐진 판잣집들. 이 풍경은 작가의 상상 속 공간으로 유년 시절 살던 마을의 풍경을 모티프로 완성했다. 작품을 인정받지 못해 힘겹던 시절을 보내며 빌딩들 사이 외로이 서 있던 남루한 판잣집을 보고 시작하게 된 작업은, 소외되고 잊혀진 것들에게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주었다. 골목을 환히 밝히는 등불들 때문인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뭉클해지는 작품. 마크 테토가 연희동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 그 따뜻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캔버스 위에 일일이 집의 형태를 조각해야 하는 일은 굉장히 고된 작업이지만, 정영주 작가는 시작부터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내야만 온전히 자신의 작품이라고 믿는다.


빛이 없으면 아마 너무 남루한 동네와 집들처럼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빛이 들어가면서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세상이 달라지기도 하죠.

M ‘도시 풍경’ 시리즈 속 따뜻한 풍경을 가진 동네는 배경이 어디인가요?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은 제 상상 속의 동네예요. 제가 태어난 1970년대 서울의 많은 동네가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었죠. 저는 상계동에서 태어나고 후에 신림동으로 이사해서 살았는데 거의 그런 모습이었어요. 서민의 평범한 일상 속 동네, 그곳이 제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죠. 누군가는 가난한 동네라고 하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다 그렇게 살았어요. 가난하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M 동네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도 궁금해요.

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면서 한지를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으로 추상 작업을 주로 했었어요. 파리에서는 꽤 반응이 좋았는데,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한지보다 좀 더 서양적인 재료와 스타일로 작업하는 게 더 인기였던 것 같아요. 트렌드에 맞는 작업을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작가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죽어도 좋으니 내 작업으로 승부를 보려고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어요. 실패를 거듭하다가 부산으로 내려가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매일이 고통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빌딩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판잣집을 보게 됐는데, 그 모습이 딱 저 같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잘나가는데 나만 초라한 거 있잖아요. 그 모습을 그려보고 싶더라고요.

M 지금하고 비슷한 그림이었나요?

아니요. 완전히 반대였어요. 제 그림 속에서는 판잣집이 주인공이고, 작은 빌딩들이 감싸고 있죠. 집이라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소중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인데 어쩌다가 하찮은 존재 취급을 당할까라는 안타까움이 들었고, 그게 저처럼 느껴져서 일부러 현실을 반전시켜서 그렸죠. 그랬더니 되려 에너지가 느껴진달까? 제 스스로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작품을 사람들이 알아봐 주더라고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림 속에서라도 현실을 전복시켜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실제로 그렇게 돼서 가끔은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게 느껴져요.

M 힘든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풍경이 어릴 때 살던 동네로 확장되고 그 안에 따뜻함까지 담으셨어요. 작품 속엔 따뜻한 조명이 보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이 함께 느껴져요.

빛이 없으면 아마 너무 남루한 동네와 집들처럼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빛이 들어가면서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세상이 달라지기도 하죠. 또 빛은 저에게 희망 같은 것이기도 하고요. 희망이 있어야 좀 살 만하잖아요.

M 이 작품이 특별히 사랑받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추상 작업을 할 때는 관객과 거리를 좀 느꼈었거든요. 아무래도 추상은 느낌 위주의 작품이다 보니 직접적인 피드백이 적어요. 동네를 그린 그림은 구상 작업이고, 의미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어서 그런지 반응이 빠르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격려도 해주고 작품도 소장해주셨어요. 그때 작가로서 고생한 지난 세월을 모두 보상받았다고 생각해요. 제 작품이 사람들에게 우리 동네가 지녔던 따뜻함을 느끼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감사하고 기쁜 일이죠.

M 따뜻한 동네를 그린 작품을 보면 그곳만의 이야기와 따뜻한 추억들이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역시 예전에 서울의 골목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서울은 골목이 참 활기차고 재미있는 곳이더라고요. 지금은 북촌에 살고 있는데, 아침 출근길에 골목에서 풍겨오는 된장찌개 냄새, 설거지하는 소리, 아이 손을 잡고 등원시키는 부모의 뒷모습 같은 것들로 마음이 따뜻해져요. 그런 풍경이 오래도록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마크 씨도 한국 사람이 다 됐네요. ‘도시 풍경’ 시리즈 중 ‘사라지는 풍경’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저 역시 그런 풍경들이 너무나 소중한데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정말 아쉬워요.

M 작품 속에 사라져가는 것들을 지키자는 메시지도 담으신 거군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저희 세대는 대부분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불안감 같은 게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저는 굉장히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특히 집에 가족이 모두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껴요. 그리고 주로 저녁의 풍경을 그리는 이유도 낮에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갔다가 해가 질 무렵에 들어오시잖아요.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저녁밥을 먹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죠. 가끔은 그런 풍경이 슬프게도 느껴지는데 아마 점점 사라져가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그런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작업하면서 그 따뜻함을 지키고 전파하고 싶었나 봐요.

M 오늘 작업실에서 본 작품 중에는 색의 변화를 통해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작업도 있더라고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계세요?

작품의 배경은 판잣집 배경으로 똑같지만 파란색만 사용해서 좀 더 몽환적인 느낌을 부여해 추상적으로 표현해보고 있어요.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포커스를 맞춰보려고 합니다.

MARK TETTO

MARK TETTO

마크 테토는 JTBC〈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2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에디터 : 심효진 | 사진 : 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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