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68)잘 길한 이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2022. 12. 1. 08:4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난데없는데 없긋(無極)이요, ‘없비롯’(無始)이다. 난 데 있어서 큰긋(太極)이요, ‘있비롯’(有始)이다. 길(道)은 난데없이 있어 참을 낸다. 참도 난데없이 있어 길을 낸다. 잘 길한 이는 난데없이 있어 ‘어수룩’(愚)하다. 난데없이 있는, 그 아무 것도 없이 있는 비움으로 우주 숨결에 맞추어 참 솟은 이다. 캐고 낸 자리에 딛고 일어서 깨닫는, 온통 깨달아 하나로 둥글둥글 널리널리 퍼져서 있지 않은 데가 없는 산숨(生氣)이다.

옛날에 참으로 잘 길(道)한 이는 씨알 밝음을 가지고 안하고 제 어수룩을 가지고 하였다. 틀려먹은 앎과 슬기를 받아서 키운 씨알 밝음은 잔꾀 덩어리다. 갈라 친 말들의 범벅이요, 온갖 뒷말의 부스러기다. 닝겔, 흐르는 시선23, 2022, 연필

잔꾀가 붙어서 써먹기부터 하려는 앎(知)과 슬기(智)를 노자 늙은이는 멀리했다. 잔꾀를 돌리니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그 앎을 불려서 슬기가 되고 또 슬기를 불려서 ‘밝’(明)을 이뤄도 되먹지 못한다. 잔꾀 부리니 막돼먹는다. 좀 알아 슬기로우면 세상을 갈라 친다.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착하고 모질고, 밝고 어둡고, 내편 네 편, 나와 남, 남과 여, 늙은이와 젊은이…. 잘 못 밴 배움이다.

본디 바탈(性)은 올 온새미로 숨 하나다. 남성(男性)과 여성(女性)에서 ‘남과 여’의 껍데기를 걷어내면 그저 바탈(性)만 남는다. 그 바탈에 숨 쉬는 씨알이 바로 우리다. 참나로 가는 길이다. 하늘을 받아 모시고 그대로 해야 할 우리다. ‘받할’이니 바탈이다. 본디 그대로의 자기 바탈을 보아야 예수요, 붓다다. 하늘 하나 솟아 도는 숨님을 속알로 모셨으니 예수나 붓다나 맨 한가지다. 예 수수해 붓다니, 처처에 얼 숨숨숨이다. 온갖 숨에 깃들어 숨 쉬는 숨이다.

예 숨에 붓다가 얼 솟나니 붓다

붓다에 예 숨이 얼 솟나니 예수

수수에 처음이 돌아 솟난 예 숨이니 늘숨

그 숨 하나로 우리 줄곧 솟날 하늘

얼숨 솟나 부으니 씻어난 이로 붓다예수

이제 여기, 예 숨 쉬는 제 숨으로 제소리 알아 저절로 틔우는 앎이 스스로 불리고 풀어서 슬기를 먹는다. 받아들임이 아니라 제절로 들임 받음이다. 받아들여 키운 앎은 ‘똥내’난다. 냄새가 사나워서 고약하다. 제절로 들임 받아 키운 앎은 ‘꽃내’(香氣)난다. 새뜻하다. 새 뜻 길하다. 앎이 절로 들임 받아 슬기를 먹고 꽃내가 번지면 시나브로 얼빛 환한 밝이 솟는다. 거룩한 얼이다. 얼 크게 솟는다. 몸에 맘얼(心靈)이 하나로 검밝(神明) 열리니 얼나(靈我:眞我)가 따로 없다.

거듭거듭 솟난 참몸(眞身)으로 얼입은 붓다예수!

참 솟아 붓다, 참 씻어 예수!

참을 부어 씻어난 예 숨이 곧 깨달은 참나!

옛날에 참으로 잘 길(道)한 이는 씨알 밝음을 가지고 안하고 제 어수룩을 가지고 하였다. 틀려먹은 앎과 슬기를 받아서 키운 씨알 밝음은 잔꾀 덩어리다. 갈라 친 말들의 범벅이요, 온갖 뒷말의 부스러기다. 귀로 배운 앎(聰明)이 뒷말 부스러기를 태워 슬기 밝을 일으켜도 결코 꽃내나지 않는다. 시커먼 연기만 퍼질 뿐이다. 그러니 잘 길한 이는 제 어수룩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럼 길한 이는 누굴까?

늙은이(老子) 20월을 떠올리자.

어수룩한 나는 누굴까? 뭇사람들이 잔치하고 봄나들이 할 때 홀로 멍하니 앉아서 아무 낌새도 없는 나는. 갓난아기 손잡아 줄 때 까르르 웃는 그 배냇웃음조차 모르는 나는. 둥둥 떠다니며 돌아갈 곳 없는 나는. 뭇사람들은 다 남아 넉넉한데 나 홀로 잃은 꼴 같으니 어리석은 마음이여 참으로 멍청하구나. 요새 사람들은 말쑥말쑥하고 또렷또렷한데 나 혼자 흐리터분하고 답답해서 꿍꿍 앓네. 아, 그래도 훌쩍 날아오른 가장 깊고 맑은 어둠의 바다(그믐) 같고, 쓸쓸한 듯 고요하고 잠잠히 조용하구나. 그래서일까? 뭇사람들은 다 씀이 있는데 나 혼자 곧이곧대로 굳고, 또 홀로 남달라서 늘 어머니 먹기를 높인다. 하늘땅에 바른 숨으로 길 뚫린 배움의 참 어머니를.

20월을 이어서 65월이 낸다. 홀로 멍하니 앉아서 아무 낌새도 없고, 갓난아기 배냇웃음조차 모르고, 둥둥 떠다니며 돌아갈 곳 없으며, 나 홀로 잃은 꼴 같으니 어리석은 마음이며, 나 혼자 흐리터분하고 쓸쓸한 듯 고요하고 잠잠하고, 나 혼자 곧이곧대로 굳고, 홀로 남달라서 늘 어머니 먹기를 높이고, 그래도 훌쩍 날아오른 가장 깊고 맑은 어둠의 바다 같은 나. 나는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짝이 없다! 나는 하늘땅에 얼빛 벼락이 내리쳐 올바른 숨으로 뻥 뚫린 길 배움의 참 어머니 씨알이요, 길 배움의 참 어머니 먹기를 높여 점점 비어진 빈탕이다. 남김없이 텅텅 비어 시원시원하고 또 거룩한 검빛 하늘의 가마득으로 깊고 멀다. 늙은이(老子) 65월은 잘 길한 이의 가마득하고 까마득한 속알을 보는 글이다.

처음에 사슴뿔이 나섰고, 그 뒤로 떠돌이 사랑이 깨달이 늙은이가 말숨을 이었다. 이제 어린님이 말을 거둔다. 어린님은 꿍꿍하는 말씀을 곱씹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靈)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3:5~8)

어린님 : 풀어서 이어 읽어 볼까? 옛날의 잘 길한 이는 씨알 밝음으로 가지고 아니하고, 어수룩을 가지고 하였다. 씨알의 다스리기 어려움이 그 슬기 많으므로써니. 이 글에서 임자말(主語)은 ‘잘 길한 이’야. 잘 길하고 길하는 게 뭘까? 말의 가온꼭지는 ‘길하다’는 말에 있어. ‘길가다’와 ‘길하다’는 조금 달라. 길을 내고 가는 것과 길을 내고 하는 것의 다름이지. 길을 내고 하는 것은 그저 본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걸 말해. 무얼 자꾸 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지. 자칫 ‘잘 길한 이’(善爲道者)의 ‘함’(爲)을 하고픔의 실천(實踐)으로 보려고 하는데 그러면 못 써.

씨알 밝음을 볼까? 잔치하면서 봄나들이 하고, 다 남아 넉넉하고, 말쑥말쑥하고 또렷또렷하고, 다 씀이 있다고 말하지. 그게 씨알 밝음(明民)이야. 그래서 옛날의 잘 길한 이는 그 씨알 밝음으로 안하고 제 어수룩을 가지고 한 거야. 저도 씨알이니 제 잔꾀 밝음을 다스리기는 아주 어려워. 게다가 말쑥하고 또렷해서 앎의 씀씀이도 크니 슬기도 많잖아. 어떤 이들은 잘 길한 이가 씨알을 어둡게 만들어야 하고 어리석게 만들어야 한다고 떠드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지.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예수가 한 말을 곰곰이 새겨야 해.

어린님 : 이어서 읽어볼까. 그러므로 슬기 가지고 나라를 다스림은 나라의 도적이오. 슬기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함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또한 본보기다. 잘 본보기를 알면, 그것을 일러 ‘감안속알’(玄德)이라 한다. 여기서 슬기는 씨알이 써먹기부터 하려는 잔꾀야. 씨알이 부리는 잔꾀 슬기로 나라를 다스리면 어떻게 되겠어? 다스림이 곧 도적질이야. 다스림을 스스로 내려놓아야지(下野). 잔꾀 슬기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다스리지 아니함이 곧 나라의 복이야. 다스림을 ‘다시림’이라고 한 것은 ‘다시 임함’의 뜻도 있기 때문이지. 잔꾀 슬기가 다시 임하지 않아야 나라의 복이거든. 다스림은 그냥 그러함이어야 해. 이걸 아는 것이 ‘본보기’(楷式)를 아는 것이지. 늘 잘 본보기를 아는 것(常知楷式), 바로 그것을 일러 ‘감안속알’이라고 해. 아래아를 쓴 것은 그 가마득의 속알이 숨 돌리고 있기 때문이고. 57월을 풀면서 “뚫려 솟난 임금(王)은 길을 나라에 닦아서 그 속알이 넉넉하겠”다고 한 것을 잘 살펴야 해.

어린님 : 읽으면, 감안속알, 깊고 멂이여. 몬(物) 하고는 등짐일까. 그러니 ‘한따름’(大順)에 이르오. ‘몬 허군 등짐일가’는, 몬 하고 등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말이야. 몬과 등지고 있음이지. 늙은이 21월에 “큰 속알 얼굴 오직 길 바짝 따름/ 길의 몬 됨 오직 환 오직 컴/ 컴하고 환해 그 가운데 그림 있/ 환하고 컴해 그 가운데 몬 있/ 아득 아득해 그 가운데 알짬 있/ 그 알짬 아주 참 그 가운데 믿음 있/ 예부터 이제껏 그 이름 떠나지 않으니/ 그로 뭇비롯 보네”라고 했어. 감안속알의 ‘감안’은 가마득하고 까마득한 걸 뜻해. 알짬이라고 할까! 그래서 깊고 멀지. 속알은 얼빛이니, 그게 아무리 작아도 몬은 빛이 될 수 없어. 크게 숨 돌아가는 까마득이니 ‘한따름’에 이른다 한 거야. 고. 자, 65월을 새겨볼까.

■김종길은
다석철학 연구자다. 1995년 봄, 박영호 선생의 신문 연재 글에서 다석 류영모를 처음 만났는데, 그날 그 자리에서 ‘몸맘얼’의 참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민중신학과 우리 옛 사상, 근대 민족 종교사상, 인도철학, 서구철학을 좇았다.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뜨거운 한 솥 잡곡밥이다.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정양모, 김흡영, 박재순, 이정배, 심중식, 이기상, 김원호 님의 글과 말로 ‘정신줄’ 잡았고, 지금은 다석 스승이 쓰신 <다석일지>의 ‘늙은이’로 사상의 얼개를 그리는 중이다.

■닝겔은
그림책 작가다. 본명은 김종민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 <소 찾는 아이>, <섬집 아기>, <워낭소리>, <출동 119! 우리가 간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등을 작업했다. 시의 문장처럼 사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다.

☞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67)낌새 없는데 꾀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211240700001


☞ 코로나19로 중단한 ‘다석사상 일요강좌’ 22일부터 재개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205201512001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