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조선시대 언론과 권력

기자 2022. 12.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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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한국 언론에 관한 뉴스들이 국내외 언론에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위한 전용기 탑승에 한 방송사가 배제되었다거나, 수년째 청취율 1위를 기록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인해 그 방송국 운영비를 제공해 오던 서울시가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언론 자체가 뜨거운 사회적·정치적 이슈였던 것은 조선 시대부터 있던 오래된 전통이다.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오사화(1498)는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연산군의 테러였다. 무오사화로 죽거나 귀양을 간 사람들 다수가 당시 언론을 주도했던 관리와 지식인들이다. 무오사화는 발발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연산군은 조선의 10번째 왕으로 건국 102년 만에 즉위했다. 그는 이전 어떤 조선왕도 밟지 못했던 교육 과정을 거쳐서 즉위했다. 유교 국가 조선의 이상을 이끌 수 있도록 세심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즉위 후 연산군은, 자신이 신하들은 물론이고 국가 이념 위에 있는 존재인 듯이 행동했다. 이것은 조선이 100년 동안 축적하고 추구한 관행과 가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겉으로 가장 잘 준비된 왕처럼 보였던 연산군은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반정(反正)을 맞았고, 축출 두 달 뒤에 죽고 말았다.

뒤이은 중종 대에 조선의 언론 활동은 더욱 왕성하고 원칙적인 모습을 보였다. 흥미롭게도 16세기인 중종·명종 대에 언론의 참여 주체가 훨씬 넓어졌다. 조선에서 본래 언론을 담당하던 곳은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두 부서의 관리들을 ‘언관(言官)’이라 했다. 그 권한은 막강했다. 왕과 정승·판서를 포함한 모든 관리들을 비판하고 탄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왕의 공부 모임인 경연을 이끌었고 사헌부는 검찰권도 가졌다. 이렇게 많은 권한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정치활동이 국가적 이상에 부합하는지 살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종·명종 대를 거치면서 아직 관직에 있지 않은 성균관 학생과 재야 지식인들도 여론 형성의 주체로 점차 인식되게 되었다. 오히려 이들은 당파 및 사적 이권과 무관하니, 그 의견이 더욱 공정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언관의 권한은 막강했지만 관직 체계 내에서의 직급은 높지 않았다. 위축되지 않고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조선은 홍문관에 ‘통청권(通淸權)’이라는 권한을 허용했다. 홍문관이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임 관원 선발에 권한을 갖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홍문관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거친 관리들로 채워졌다. 세 기관 관원은 문관(文官)이므로 원칙적으로 이조 판서가 인사권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이들 세 기관에 대해서만은 이조가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수직적이기 쉬운 관료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선왕조의 조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직은 ‘청직(淸職)’으로 불리며 명예롭게 여겨졌다. 홍문관이 통청권을 행사하면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은 하나처럼 움직였고, 이들은 왕과 정승·판서를 상대로 더욱 비판적으로 발언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권력을 휘두른 간신들이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다른 왕조들보다 비교적 적었던 것은 언관의 긍정적 기능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조직도 시간 앞에서 변화와 변질을 피할 수 없었다. 당쟁이 오래 이어졌고, 언관직은 각 당파가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목표가 되었다. 결국 18세기 초반 무렵이 되면 당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당파가 언관직을 장악하게 된다. 어느덧 언관은 집권 기득권 집단의 이념적 전위부대가 되고, 권력 그 자체가 되었다. 언론이 정치권력의 일부가 되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언론의 건설적 기능은 사라졌다. ‘통청권’이 폐지된 것은 1741년(영조 17년)이다. 당쟁을 끝내고 나라를 개혁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취한 조치이다. 역사는, 좋은 권력보다 좋은 언론을 갖는 것이 더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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