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과학자, 누가 어떻게 키울까?
(지디넷코리아=한세희 과학전문기자)의사과학자는 의사이면서 과학자로서 충분한 훈련을 받은 연구자를 말한다. 기초과학과 임상 두 영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균형있게 갖춘 전문가로서 신약 개발이나 바이오 분야 혁신을 선도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 최근 25년 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37%, 상위 10개 제약회사 대표과학책임자의 70%가 의사과학자이다. 화이자와 모더나에서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주도한 사람들도 모두 의사과학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런 의사과학자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연간 4000명 가까운 의치대 졸업자 대부분은 임상의가 된다. 전공의 과정 대신 기초의학 연구를 선택한 연간 30명 정도만 의사과학자라 할 수 있는 셈이다.
■ 반도체보다 3배 큰 시장인데...의사과학자는 부족
우리나라가 IT와 바이오, 의료 분야에서 각각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정작 의학과 공학의 연결 고리가 약해 반도체보다 3배 이상 큰 바이오 시장을 놓치고 있다는 반성이 나온다. 국내 바이오헬스 산업은 1조 7천600억달러 규모의 세계 시장에서 몇년 째 점유율 2%의 덫에 갇혀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30일 정청래·정춘숙 의원 주최, KAIST 주관으로 국회에서 열린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국가 전략 국회 토론회'에서 "의사과학자 출신으로서 어려웠던 점이 의과대학에선 환자 치료만 배우고 연구를 위한 기초는 배우지 못한 것"이라며 "의학은 궁극의 융합학문으로서, 이 분야(의학과 과학의 융합)는는 대한민국의 '브레이크스루(한계를 돌파하는 혁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과학자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양성 방법엔 의견이 갈린다. KAIST와 포스텍 등 과학기술 중심 대학들이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새 교육 과정 설립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의료계에선 기존 의대를 통한 의사과학자 육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의사과학자 양성이 의사 정원 확대로 이어지리란 우려도 논란이다.
■ 연구중심 의대? 과기중심 대학의 창의적 접근?
KAIST는 의학과 공합을 융합한 8년 과정의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과정을 만든다는 목표다. 3년 간의 집중적 의학 교육과 1년 간의 의학 및 인공지능(AI), 바이오 융합 교육을 실시하는 의사과학 기초 과정 후 다시 의학과 과학을 융합한 4년 박사 과정을 밟는 커리큘럼이다.
또 대전 문지캠퍼스에 420억원을 투자해 혁신 디지털 의과학원을 설립, 첨단 의과학 연구와 바이오 의료 분야 창업 지원의 본거지로 키운다. 현재 KAIST 본원에 있는 의과학대학원도 새 캠퍼스로 이전한다.
김하일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축구에는 중원을 장악하는 미드필더도 중요하고, 창의적 플레이로 돌파구를 만드는 박지성 선수 같은 '윙어'도 중요하다"라며 "지금의 의사과학자가 의학과 과학을 잇는 미드필더였다면, KAIST는 창의적 융합을 가능케 할 윙어를 키우려 한다"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대학 중심의 의사과학자 양성을 주장한다. 의대가 있는 대학은 보통 공과대나 자연대, 보건대 등을 함께 지닌만큼 이 생태계를 활용해 연구중심 의대를 만들자는 의견도 나온다.
신찬수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사장은 "기초의학 분야 연구기관 및 연구자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고, 미국 하버드대와 MIT, 보스턴 지역 병원과 같이 의대와 과학기술 특성화대학 간 컨소시엄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IT와 바이오 등을 결합해 창의적 보건의료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이공계 중심 접근과 현장 임상 경험에 기반해 수요를 발굴할 수 있는 의대 중심 접근이 서로 장점을 내세우는 모양새다. 반대로 임상 경험의 한계는 과기중심 대학의 단점, 임상의 육성에 초점을 맞춰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는 것은 의대의 단점이다.
의사 정원도 민감한 문제이다. 의료계는 의사과학자 양성이 의사 정원 확대로 이어지는 것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KAIST와 포스텍 등은 연구개발과 창업 중심의 교육을 받은 의사과학자들이 개원 임상의가 될 확률은 낮다고 설득하고 있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KAIST가 추진하는 의학 교육 과정엔 레지던트 과정이 없다"라며 "개원의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추가로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의사과학자, 양성보다 유지가 중요
의사과학자 양성보다 이들이 연구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상의가 되면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반면, 의사과학자는 연구비가 부족하고 안정적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다. 임상의 복귀라는 선택지가 있는 의사는 연구자 경력을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의학박사와 과기 분야 박사를 함께 수여하는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갖춰진 미국 학계에서도 나타나는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국립보건원(NIH) 같이 포괄적 연구가 가능한 기관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산업계와 소통도 중요하다. 현장 수요를 발굴해 사업화로 이어가기 위해 밀접히 협력해야 하고, 여기에 의사과학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산업계는 연구비나 기업 펀딩, 기술 수익 등을 통해 의사과학자 활동이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인프라를 만들 수도 있다.
인공지능 기반 병원정보 시스템 등을 공급하는 아크릴의 박외진 대표는 "기업 입장에서 병원과 협력이 중요한데, 의료진 입장에선 열심히 할 인센티브가 없다"라며 "의사과학자는 의사가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업"이라고 말했다.
이창윤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인구 감소로 미래 과학기술 인력 수급도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우수 과학 인력을 활용하려면 의사과학자 양성은 국가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촘촘한 연구비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병원이나 기관에서 의사과학자 연구 환경이 잘 구축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형훈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공학과 의학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고 있다"라며 "의대, 병원, 제약 업계 등과의 개방적 협력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한세희 과학전문기자(hahn@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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