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세계무대로 이끈 개혁가 … 고속성장으로 'G2 기반' 닦아

손일선 특파원(isson@mk.co.kr) 2022. 11. 30. 20: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쩌민 전 中주석 별세
재임시절 홍콩·마카오 반환
2001년 中 WTO 가입 성사
대규모 외자유치 성장 발판
톈안먼 유혈진압은 '과오'
1997년 10월 29일 미국을 국빈방문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마주 보며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의 제3대 최고지도자였던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관영 신화통신은 장 전 주석이 30일 낮 12시 13분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당 중앙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며 실제 행동으로 애도를 표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1997년 11월 10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을 방문 중인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포옹하는 모습. 【AP연합뉴스】

1926년 8월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자동차 회사를 다니다 1962년 상하이 전기과학연구원의 부소장을 맡게 된다. 이후 덩샤오핑이 1983년 그를 전자공업부 부부장에 임명하면서 핵심 관료로 성장하게 된다. 1985년 상하이 시장에 선출되면서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덩샤오핑의 신뢰를 얻으면서 실각한 자오쯔양으로부터 공산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 이어 1993년 국가주석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모두 맡는 첫 번째 중국 지도자가 됐다.

그는 최고지도자 재임 중 굵직굵직한 정치·경제·외교적 성과를 달성했다. 장 전 주석은 상하이 출신 인사들을 요직에 대거 기용하면서 중국의 3대 권력 계파로 꼽히는 '상하이방'의 산파 역할을 했다. 또 공산당은 지식인과 자본가, 인민 등 3대 세력의 근본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3개 대표 이론'을 주창해 왔다. 전통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척받는 자본가 계급을 끌어안은 것이다.

2017년 10월 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19차 당대회 폐회식에서 장쩌민 전 국가주석(오른쪽)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다. 장 전 주석은 지난 10월 열린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는 불참했다. 【AP연합뉴스】

이 때문에 항상 노동자뿐 아니라 시장의 역할에도 주목했던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3개 대표 이론'은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당장(黨章·당헌)에 정식으로 삽입되면서 중국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장 전 주석 시절 중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집권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9.3%에 달했다.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유훈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대규모 투자 촉진 정책, 수출 중심 경제구조 확립, 외자 유치 등을 적극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세계 2대 강국으로 도약했다.

우선 그는 1997~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극복하며 중국 고속성장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또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2008년에는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중국을 세계 경제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콩과 마카오 반환도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이뤄졌다. 장 전 주석은 과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꼽기도 했다.

이런 경제 성과를 바탕으로 외교적으로도 중국의 영토를 넓혔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 외교 노선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대국으로서 필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은퇴 이후에도 상하이방의 원로로서 중국 정계에 깊숙이 개입하며 현역 지도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기에는 상하이방이 시 주석의 '정적 세력'으로 분류되면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됐다. 장쩌민 계파에 속했던 보시라이 전 충칭 시장, 쉬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 등이 잇따라 숙청된 것은 상하이방 몰락의 단적인 예다. 지난 10월 제20차 당대회에 불참하면서 건강 이상설도 제기됐다.

장 전 주석 사망으로 중국 전역은 큰 슬픔에 잠긴 모습이다. 베이징 톈안먼광장 등 도심 주요 지역에는 조기가 게양됐고 신화통신 등 중국 관영 언론들은 애도의 표현으로 홈페이지를 흑백으로 전환했다. 중국 공산당은 장 전 주석 장례위원회 명단도 공개했다. 시 주석이 주임 위원이며 리커창 총리,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상무위원들이 모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베이징/손일선 특파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