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죽음들…‘고성능 레이더’ 아닌 ‘강렬한 햇볕’을

한겨레 2022. 11. 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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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송파 세 모녀 6주기 및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추모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추모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복지사각지대 해소 대책들이 송파 세 모녀의 죽음 이후 발표되었지만 빈곤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며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왜냐면] 최영준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웃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신촌과 인천 서구에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웃들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28일 이 사건들을 언급한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내년 취약계층이 급증할 것이라며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위기가구를 촘촘하게 찾아내기 위한 ‘고성능 레이더’ 예산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고성능 레이더’는 2014년 ‘송파 세모녀 사건’ 이래 내려오는 복지 사각지대를 보는 정책결정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데이터를 더 모으고 실시간 정보체계를 강화하면 이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과로하고,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신에 이런저런 신호들이 나타나게 된다. 피부질환이거나 감기, 몸살이 될 수도 있다. ‘고성능’ 약으로 당장의 증세를 없앨 수야 있겠지만,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결국 더 큰 질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 역시 그야말로 지치고 지쳐 심신이 쇠약한 몸과 같다. 빈곤과 불평등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낮은 출산율, 가장 낮은 건강인식, 가장 높은 성별임금격차, 가장 많은 노인빈곤, 가장 약한 사회적 지지체계, 가장 높은 우울증 발현율을 보인다. 여기에 계속되는 비정규직 문제와 영세자영업 문제가 있다. 감기를 넘어 이미 심각한 질병 단계로 넘어간 상태다. 그런데,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을 찾는 레이더만 발전시키면 해법이 될까? 심지어 레이더를 가동해서 찾아내도 줄 수 있는 급여나 서비스가 별로 없다는 현실을 정책결정자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물 위로 드러난 것은 큰 빙산의 작은 조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살과 죽음 언저리에 와있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존재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런 자살과 죽음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우리 사회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노동권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조기에 주된 일자리에서 힘없이 밀려나며, 안전한 일터와는 거리가 먼 현실에 좌절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되며, 끊임없는 경쟁에 밀려 패배자라는 인식 속에서 고립돼 가는 이들이 있다. 빈곤과 죽음은 그 마지막에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더욱더 ‘선별’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시민과 노동자의 희생만, 성장과 경제논리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이 거대한 빙산과 같은 체제가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조각만을 찾아서 해결하자고 한다. 빈곤층만이 약자가 아니다. 자살률이 급증하는 10대와 20대, 일-생활 균형을 찾기 어려워하는 엄마아빠들, 직장에서 자신의 권리와 인격을 훼손당하며 일하고 있는 이들, 자신이 고용주인지 노동자인지도 혼란스러워하며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는 이웃들 모두 약자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고성능 레이더가 아니라 따듯하고 강렬한 햇볕이다. 빙산의 일각만을 녹일 수 있는 햇볕이 아니라 그 빙산의 일각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녹일 수 있는 햇볕이어야 한다. 원인이 치유돼야 더는 송파 세모녀 사건 이래 계속되는 이 죽음을 멈출 수 있다.

“혹한”이 오고 있다는 정진석 위원장 말에 동의한다. 턱밑에 온 경제위기만이 아니다. 디지털경제와 국제정치경제 여건은 이 혹한을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복지는 보호의 역할도 하지만, 투자의 역할도 한다. 더 어려운 때가 올수록 복지가 모두에게 비추는 햇볕이 돼야 한다.

여야가 예산을 심사하면서 심신이 허약해진 대한민국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열어 나아가길 바란다. 당연히 빈곤층에 보다 넉넉한 지원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안된다. 고성능 레이더와 긴축재정보다는 모두에게 비추는 강렬한 햇볕을 만들어내는 넉넉한 확장재정과 관련 입법들, 그리고 재분배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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