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갑 칼럼] 고금리 태풍에 집주인 세입자 모두 `푸어`
며칠 전 영화 '올드 보이'를 다시 봤다. 영화를 보는 도중 인상 깊은 대사가 있었다.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빠지면)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물에 빠지면 부력이 없는 물체는 대부분 가라앉는다. 무게가 무겁든, 덜 무겁든 말이다. 한마디로 무차별적이다.
물속에 빠진 물체와 고금리 속의 부동산시장이 엇비슷한 것 같다. 지역에 관계없이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 그동안 가격이 많이 올라 무게가 무거워졌다면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이 추락할 것이다. 반대로 가격이 덜 올랐다면 하락 속도가 더디고, 덜 떨어질 것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금리가 모든 자산시장의 중력으로 작용한다. 미래의 금융이자 부담만큼 혹은 금리인상이라는 불확실성만큼 매수자는 할인을 요구한다. 당연히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주택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동반 하락현상이다. 집을 사지 않으면 전세로 살려는 수요자들이 늘어나 전셋값이 되레 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주택시장 내부 역학관계만 보는 데서 생기는 착시다. 전세시장을 거시경제 혹은 금융시장 시각으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은 전세를 구할 때 제 돈만 갖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다. 타인 자본, 즉 대출을 낸다. 금리가 오르면 기존에 대출을 낸 사람도 힘겹지만 새로 구하는 사람도 부담이 늘어난다. 당연히 고가전세를 중심으로 수요가 줄어든다. 금리 앞에 장사 없다. 고금리 충격하에서 주택시장에서 매매와 전세가 동조화 현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지역에서는 매매가격보다 전세가격이 더 떨어진다. 실제로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들어 10월까지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격은 -3.8%로 나타났지만 전세가격은 -4.3%로 더 하락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사금융인 전세시장은 집주인이 시장 흐름에 더 순응적인 자세(가격 순응자)를 보이는 특성도 기인한다. 2년 혹은 4년 뒤에 전셋값을 올려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에 시세보다 낮춰 거래를 해도 큰 손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세입자로부터 자금 차입을 좀 덜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매매시장보다 '손실 회피'나 '처분 효과'가 덜 작용하니 경색기에 전세가격이 매매가격보다 더 하락하는 것이다. 손실 회피는 이익에 따른 행복보다 손실에 따른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심리적 현상이고, 처분 효과는 가격이 오른 부동산은 재빨리 팔지만 손해 본 부동산은 너무 늦게 파는 현상이다.
과거에도 이런 현상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2년 하우스푸어 사태 당시에도 매매가격보다 전세가격이 더 하락했다. 전세가격이 매매가격보다 더 떨어지면 전세를 끼고 투자하는 갭투자가 힘들어진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단기간에 전셋값이 많이 떨어지니 집주인은 재계약 때 세입자를 잡기 위해 내린 전세금만큼 월세로 지급하겠다는 역월세까지 제의하고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도 대출이 여의치 않으니 궁여지책을 쓸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현재 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을 의미하는 전세가비율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KB통계기준으로 10월 현재 수도권 아파트 전세가비율은 62%이다. 이는 2008년 9월 리먼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41%), 하우스 푸어 사태가 절정에 달했던 2012년 9월(55%)보다 훨씬 높다. 이는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더 많은 돈을 빌려줬다는 것을 뜻한다.
집값이 급락하면 세입자도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을 떼일 위험에 처한다. 다시 말해 이번 하락기에는 깡통전세와 깡통주택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전세라는 임대차제도 하에선 집값이 크게 떨어지면 집을 가진 사람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세입자도 고통을 받는다. 집값 하락에 대출이자 부담에 어려움을 겪는 '영끌 푸어'와 '렌트 푸어'가 생기지 않도록 정부가 적절한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세입자를 위해서도 부동산시장의 연착륙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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