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오피스 빅뱅`, 근로시간 단축부터
코로나19 이후 시차출퇴근제, 재량근로시간제, 재택근무제 등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기업들의 비율이 늘면서 시간과 공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선택해 탄력적으로 일하는 하이브리드 워크 시대에 접어들었다.
매년 다음 한 해의 소비 트렌드를 전망해 온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코로나19가 이전부터 축적된 일하는 방식 변화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시금석이 됐다"며 내년 키워드로 '오피스 빅뱅'을 제시했다. 산업화 이후 유지됐던 조직 문화가 빅뱅 수준으로 격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명명한 것이다.
그는 책에서 "일에 대한 개인·조직·시스템 차원의 변화가 매우 근원적이고 폭발적"이라며 "노동의 방법과 기간의 고정관념을 깨는 변화가 시작되면서 노동시장의 판이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퇴직 열풍이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조직 문화의 개편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노동 시스템 전반에 대한 사회적 전환으로 번지고 있다"고 노동 현상을 짚었다.
정부는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7월부터 전문가 중심의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구성해 근로시간제도 유연화 관련 논의를 시작했다. 지난 17일 발표한 초안에는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주에서 월 이상으로 확대하고 초과근로시간을 적립해 휴가 등으로 사용 가능한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하는 내용을 담았다. 선택근로시간제 적용 대상 확대와 고소득 전문직에 대한 근로시간 적용 제외 검토도 포함했다.
2018년 3월 도입된 주 52시간제는 기본 근로시간 40시간을 넘는 연장 근로시간을 최대 12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초안대로 제도 개편이 이뤄질 경우 주당 근로시간은 최대 69시간으로 늘어나게 된다. 연구회 좌장인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산술적으로는 주당 69시간까지 가능한 것으로 계산되지만 이는 극단적 상황"이라며 "여러 건강보호 조치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이에 대해 한국의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취지와 반대로 가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경영계도 정부가 논의 중인 개선방안이 근로시간 총량 규제라는 기존의 규율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기업의 다양한 요구와 현실을 반영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과거 제조·생산직에 맞춰 만들어진 획일적 근로시간 규율체계가 주52시간 시행 이후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구조·근무형태와 괴리가 확대되고 있어 탄력·선택·재량 등 유연근로제를 기업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피스 빅뱅은 4차산업혁명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최근 노동시장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일은 하되 조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승진 거부'와 최소한의 일만 하는 '조용한 사직' 등 오피스 빅뱅 현상은 근로시간 단축과도 연결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제도 개편으로 노동자들의 연장·야간·휴일 근무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지금 주 52시간 유연화를 논할 때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을 논해야 할 때"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 연간 근로시간은 지난해 기준 191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200시간 이상, 독일보다는 566시간(1.4배)이나 많다. OECD 38개 회원국 중 멕시코,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칠레에 이은 5위다.
대한상의는 '근로시간 적용제외제도 국제비교와 시사점 연구'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보다 근로시간이 짧은 주요 선진국에서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논쟁이 거의 없는 것은 특정 직무에 대해 근로시간 규율을 적용하지 않거나, 노사가 합의를 통해 법정 근로시간을 초과하는 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제도를 이미 도입해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산업환경의 변화에 따라 근로시간 총량이 아닌 창의적 발상 등을 통한 성과물이 중요해지고 있는 현실에 맞게 근로시간 규율체계는 재정립돼야 한다. 근로시간은 기본적으로는 단축해나간다는 정부의 기조대로 노동계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 현장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
연구회는 이번에 공개한 안을 토대로 추가 논의를 거친 뒤 다음달 13일 최종 권고문을 내놓을 예정이다. 근로시간제도 유연성을 강화하는 만큼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매뉴얼을 내놓을지도 지켜볼 문제다.
박은희 산업부 재계팀장 ehpar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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