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 자율·後 책임' 확립···위험예방 모범기업엔 안전감독도 제외

세종=양종곤 기자 입력 2022. 11. 3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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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발표]
'英 로벤스보고서' 자기책임제 본떠
年800명대 재해 200명대↓ 목표
사망·사고 연속 발생땐 고강도 처벌
근로자에도 '안전책임' 의무 부여
재계 "방향성 공감"···勞는 "우려"
경기도 시화공단의 한 공장에서 직원이 공작 기계를 수리하고 있다. 이호재 기자
[서울경제]

1960~1970년대 영국의 사망 산재 상황은 현재 한국보다 심각했다. 1964년 런던에서 무너진 크레인이 버스를 덮쳐 승객 7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는 50여 년이 지난 한국에서 거의 그대로 재연됐다. 지난해 6월 광주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무너지면서 지나가던 버스를 덮쳤고 9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은 1996년 폭우로 암석, 석탄 찌꺼기가 애버밴이라는 탄광 마을로 쓸려 내려와 14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국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 1호 적용 사고인 올해 1월의 채석장 붕괴 사고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영국과 한국의 현재는 너무 다르다. 영국은 1970년대 연간 800명대이던 사망 산재를 200명대로 확 줄였다. 한국은 지난해에도 828명이 사망 산재를 당했다. 한국의 사망 산재 현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에도 못 미친다.

정부가 30일 처벌과 감독 중심에서 예방과 자율 중심으로 전환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은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 안전 정책인 ‘로벤스 보고서’를 벤치마킹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로벤스 보고서에 대해 “한국보다 먼저 중대재해를 고민했던 선진국은 촘촘한 정부 규제와 처벌만으로는 더 이상 감축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사전 예방과 노사의 자발적 노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고용부가 이날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은 위험성 평가 의무화가 핵심이다. 정부의 일률적인 감독과 안전 관계 법령 준수 강제에서 벗어나 노사 스스로 위험·유해 요인을 찾아 사업장에 맞는 자체 규범을 만들고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기업들이 다양하고 쉽게 사업장마다 적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산업안전법령 정비가 이뤄진다.

고용부는 일련의 과정을 ‘자기 규율 예방 체계’라고 설명했다. 고용부는 자기 규율 예방 체계를 제대로 운영하는 기업은 안전 감독도 배제하는 등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할 방침이다. 하지만 ‘자기 책임 원칙’이 병행된다. 위험성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상습적이고 사망자가 다수 발생한 기업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강한 처벌이 이뤄진다. 이는 ‘로벤스 보고서’의 자율 규제 시스템을 본뜬 것이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0일 산업 안전 토론회에서 “로벤스 보고서는 당시 산업안전보건법령이 너무 많고 복잡하고 파편화됐다고 지적했다”며 “정부의 안전 규범뿐 아니라 사업주가 자율적으로 만든 자체 규범도 안전 법령의 준수로 봤다”고 설명했다.

고용부가 자기 규율 예방 체계를 새로운 대책으로 꺼낸 배경에는 중대재해법 등 처벌 위주인 현 대책의 한계도 자리한다. 한국은 산재 빈도가 높은 구조적 원인이 있다. 다른 업종에 비해 사고 빈도가 높은 제조업 비중이 전체 산업의 약 30%에 달한다. 위험의 외주화로도 불리는 원·하청 구조가 만연하고 산재 예방 체계를 갖추기 어려운 중소기업이 전체 기업의 90%를 넘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한 중대재해법과 같이 강한 형사처벌로 기업의 사고 예방을 기대했다. 하지만 올해 중대재해법 적용 사망 사고는 10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17명 늘었다. 2024년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중대재해법이 확대 적용될 경우 수많은 범법자를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경영계에서 나온다. 이 장관은 “안전 대책이 타율로 이뤄지다 보니 기업은 처벌을 회피하기 위해 서류 작업에 치중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고용부는 내년 상반기 산업안전보건법령 개선 태스크포스를 신설해 중대재해법의 예방 실효성을 높이고 제재 방식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의 또 다른 특징은 고용부가 기업에만 사고 책임을 지우는 방식도 효과적인 사망 산재 대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이번 대책을 통해 현장을 잘 아는 근로자를 안전 대책 전면에 세운다. 근로자가 참여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설치 기업 기준은 100인 이상에서 30인 이상으로 확대된다. 근로자의 핵심 안전 수칙 준수 의무도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된다.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의 성패는 기업들이 자기 규율 예방 체계를 빨리 도입할 수 있도록 후속 대책과 입법 지원이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뤄지느냐에 달렸다. 영국 의회는 ‘로벤스 보고서’를 입법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성과를 냈다. 대책을 두고 경영계와 노동계는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경영계는 “자기 규율 예방 체계는 공감하지만 위험성 평가 의무화는 또 다른 규제일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노총은 “대책은 경영계가 원한 안전보건 규제 완화 내용이 적지 않다”고 밝혔고 민주노총은 “기업 처벌과 감독은 완화하고 노동자 의무와 통제만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세종=양종곤 기자 ggm1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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