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과학자는 찬성, 신규 의대 설립은 글쎄?...KAIST는 의학계 ‘신중론’ 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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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혁신 이끄는 의사과학자 육성 필요성 내세워
의대·의사단체는 신중론… 의대 정원 확대 이어질까 경계
카이스트(KAIST)가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겠다며 의과학원(의대) 설립을 공식화한 가운데 의학계가 신규 의대 설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의료 문제의 주무부처라고 볼 수 있는 보건복지부도 의사과학자 양성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도 신규 의대 설립에는 신중한 입장이어서 KAIST의 의대 설립까지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KAIST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국가 전략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광형 KAIST 총장을 비롯해 KAIST의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핵심 관계자가 모두 참석했을 정도로 KAIST에서 많은 힘을 쏟고 있는 역점 사안이다.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웠지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KAIST 의대 설립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자리였다. 이 총장은 “의사과학자는 바이오·신약 연구의 핵심이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그 체계가 아직은 미비한 수준”이라며 “바이오 산업의 글로벌 시장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산학연 각 분야를 아우르는 새로운 국가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국회 과방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청래 의원과 보건복지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춘숙 의원뿐 아니라 의사 출신으로 기업 창업 경험이 있는 안철수 의원 등이 축사를 하며 지원 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KAIST 의대에 힘을 싣는 분위기다.
◇바이오 혁신 이끄는 ‘의사과학자’… 한국에선 가뭄에 콩 나듯 나와
이날 토론회 발제자로 나선 김하일 KAIST 의과대학원 교수는 “바이오 헬스 분야에 정부 연구개발(R&D)이 큰 폭으로 성장했지만 R&D의 양적인 성장에 대비해 바이오 헬스 산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R&D 투자가 산업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은 핵심인재 양성인데, 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의사과학자 양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의사면허(MD)를 딴 뒤에 임상의가 아닌 연구자가 되는 사람을 의사과학자라고 부른다. 해외에선 의사과학자가 적지 않다. KAIST에 따르면 2020년 미국의 경우 의대 재학생이 9만4243명인데 이중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는 건 5913명으로 6%에 이른다. 반면 한국은 의대 재학생 2만5833명 중 의사과학자의 길을 걷는 건 1%도 되지 않는다.
의사과학자는 미국 바이오 헬스 산업의 성공 신화의 주역이다. 지난 25년 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37%가 의사과학자고, 상위 10개 제약회사 대표과학책임자(CSO) 10명 중 7명도 의사과학자 출신이다. 모더나의 공동 창업자인 로버트 랭거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석좌교수나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섰던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도 의사과학자다.
KAIST는 임상의 배출을 목표로 하는 현행 의과대학 체제에서는 의사과학자 양성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연구 중심 대학인 KAIST가 아예 의대를 만들어서 별도로 의사과학자 양성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날 KAIST는 의과학원을 신설해 한국원자력의학원, 국립암센터 등 임상연구협력병원과 함께 의사과학자를 육성하고, 기존 의과학대학원은 의사공학자 집중 육성 프로그램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공개했다.
◇KAIST, 의대 신설·기존 의과학대학원은 의사공학자 육성 투트랙
KAIST 문지캠퍼스에 일단 바이오-메디신 콤플렉스를 구축한 뒤 중장기적으로 오송캠퍼스에 바이오메디컬 캠퍼스를 구축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내놨다. 김하일 KAIST 교수는 “의사과학자를 육성하기 위한 과거 정부 차원의 노력들이 있었지만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 했다”며 “KAIST가 2023년에 의과학원을 설립해서 한국 축구를 이끌었던 박지성 같은 의사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산업계 관계자들은 의사과학자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KAIST 의대 설립에 힘을 보탰다. 나군호 네이버 헬스케어연구소장은 “디지털 헬스케어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학과 디지털 기술을 아우르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며 “네이버가 헬스케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학 분야의 전문성이 있는 의사를 채용하려고 했는데 마땅한 인재를 찾는게 너무 어려웠다”고 말했다. 나 소장은 본인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교수 출신으로 네이버 디지털 헬스케어를 맡은 의사과학자이기도 하다.
헬스케어 스타트업인 아크릴의 박외진 대표도 “AI 기반으로 병원 정보 등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다보니 병원이나 의사들과 협업하는 경우가 많다”며 “산업계와 협업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의사과학자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KAIST 의대 설립에 우호적인 목소리만 나온 건 아니었다. 신중론도 적지 않았다. 왕규창 한국의학한림원장은 “기초의학의 정체성이 퇴색되고 의학 교육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문제제기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의대 정원을 늘리거나 KAIST 의대를 신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고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의대에서도 의사과학자 양성 가능… 불안정한 처우 해결부터 지적도
신찬수 한국 의과대학 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사장도 KAIST나 포스텍에 의대를 설립하는 식으로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보다는 기존의 연구중심의대 사업을 활성화하는 게 더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제안했다. 신 이사장은 “기존 의대 안에 이미 학위와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는데도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전무하다”며 “KAIST나 포스텍이 의대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 의대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공동연구를 하는 등 대안을 찾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의사 단체들도 반대 입장이다. KAIST나 포스텍 의대 신설이 의사 정원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걸 경계하는 것이다.
더 현실적인 문제제기도 있다. 의대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다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처우를 목표로 하는데 KAIST나 포스텍 의대가 생긴다고 의사과학자 양성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KAIST나 포스텍 의대를 졸업하고 임상의가 되겠다고 돌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의사단체의 우려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지금도 많은 졸업자가 의사과학자를 택하지 않는 건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라며 “의대를 졸업하고 과학자로 남는 사람이 1%도 안 되는 건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데 KAIST나 포스텍이 비전을 보여주지도 않고 새로운 의대부터 만든다고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신찬수 이사장 역시 “미국도 의사과학자 프로그램에서 빠져나가서 의사가 되는 등 누수가 많다”며 “연구비에서 혜택을 주거나 안정적인 연봉이나 신분을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의학 쪽에서는 그런 안전망이 없다”고 지적했다.
KAIST와 포스텍 의대 설립의 키를 쥐고 있는 정부는 아직 한 발 떨어진 모양새다. 보건복지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이형훈 보건의료정책관은 “의사과학자 성공 사례라는 미국만 해도 무턱대로 의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협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의학 분야에서 좋은 연구가 나오려면 임상에서 가까워야지 임상과 떨어져서 연구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창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인구 감소 시대에 과학기술 인력의 감소도 불가피한데, 이때 산업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가 의사과학자라고 생각한다”며 “독립된 연구자로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건 국가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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