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월출산 아래, 대동(大同)사상도 꽃 피었다

2022. 11. 3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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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호남정맥 지나 불쑥 솟은 靈山
그 아래 왕인,도선,최지몽,최덕지 배출
무역의 중심지 구림마을, 대동사상 발원
왕인 박사 논어-천자문 들고 일본간 곳
전란땐 이웃 고을과 의병활동,마을수호
인본주의,경제번영 ‘월출 르네상스’ 중심
장암,영보촌도 대동으로 경제·문화·호국

[헤럴드경제, 영암=함영훈 기자] 3000리를 달려온 백두대간이 끝나고 호남정맥 마저 끝난 지점, 영암에 불쑥 나홀로 솟은 산이 월출산이다. 해발 809m라고 우습게 볼수 없다. 태백산(1567m)은 평지인 해발 800m에서 오르니 월출산 오르기보다 쉽다. 등산 내내 땀을 훔쳐야 하는 기암절벽의 지세라서 정복하기 쉽지 않은 영산(靈山)이다. 가히, 실경 한국화라 부를 정도로 수려하고 장엄하다.

월출산
영암 구림마을 전경

영암(靈巖)은 예로부터 장엄하고 수려한 월출산의 정기를 받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온 남도 문화관광의 중심이다. 백제 왕인박사, 신라 도선국사, 고려 최지몽 선생, 송해 선생처럼 공직에 봉직한 조선 충신 최덕지, 바둑의 조훈현, 트로트 하춘화를 낳은 전인적 인재들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논어와 천자문을 들고 일본에 문명을 일궈준 왕인 박사의 출항지 구림-상대포 마을과 덕진면 영보리 최덕지 후예들의 마을, 영암읍 장암리는 반상과 귀천, 빈부를 초월해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자 다짐하고 실천하던 대동(大同) 정신의 진원지이다.

영암 매력한우 육회초밥

농지 면적 전국 11번째, 친화경 고품질 농축업의 메카로서, 매력한우, 한우육회초밥, 토종닭요리 등 육지의 청정 미식, 삼호읍이 조선업 등 대불산업단지로 변모하면서 목포-장흥 등지 수산물을 공급받아 영암의 손맛을 가미한 어란, 독천낙지마을 갈낙탕, 낙지구이, 짱뚱어탕이 입맛을 자극하는 곳이다. 영암국제자동차경주장, 기찬랜드의 역동성과 유쾌함은 또 어떠랴.

문화유산여행의 두 축, 자연유산(월출산), 문화유산(대동계의 구림-일본 계몽 진원지 상대포-영보촌-가야금과 트로트의 메카가 있는 기찬랜드)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룬 여행지가 바로 영암이다.

기찬랜드의 한국트로트가요센터. 영암출신 하춘화 가수의 어린시절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한 밀랍인형
구림마을 상대포. 왕인박사의 일본 계몽 선박이 늘 띄워져 있다.

2200년의 역사를 가진 구림전통마을은 일본의 문명화-계몽을 도와준 왕인박사의 출발지였고, 국제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더불어 함께 살아하는 대동(大同)의 개념이 청의 강유위(康有爲) 사상 보다 300년 가량 빨리 등장한 영암 인문학의 중심이다.

구림마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 일왕의 초청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한 상대포가 있던 곳이다. 그는 문명을 전하고 태자의 스승이 됐다. 일본 다이니혼정 신사 등에선 신(一本松明神)으로 모신다. 왕인 선생을 통해 문명의 눈을 뜬 일본의 벚꽃사랑은 수천년 역사를 가진 영암 백리벚꽃길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있다. 구림마을 상대포엔 매년 왕인 박사의 일본 후진들이 찾아 배례한다.

구림전통마을 동쪽 문필봉 기슭에 왕인박사의 발자취를 복원해놓은 왕인박사유적지에 가면, 왕인 묘, 계곡 성천, 왕인 석상 및 전시실을 만난다.

왕인박사유적지는 일본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유적지에서 왕인석상에 이르는 등산로는 서해안 최고의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유적지 정문인 백제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일본에서 헌정한 왕인정화비가 있고 맞은편에 전시관이 있다. 문 하나를 더 들어가면 안쪽에 왕인 사당이 있다.

구림마을 회사정

유적지에는 왕인박사의 탄생지인 성기동과 왕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이 있으며, 탄생지 옆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곳으로, 월출산 서쪽 산 중턱에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책굴은 왕인이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이다. 성기동 서쪽에 있는 돌정고개는 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동료, 문하생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든 고향을 뒤돌아 보았다하여 돌정고개가 되었다 한다. 전시관에는 탄생도·수학도·도일도·학문전수도 등이 걸려 있다.

구림마을은 서남해로 흐르는 영산강 물줄기 따라 바닷길이 열렸던 곳으로 일찍부터 우수한 청동기·철기문화가 유입되었고 고대 중국과 일본의 교역로로서 국제적인 선진문화가 꽃피웠던 마을이다.

특히 신라가 이 지역을 지배하던 남북국시대엔 한국 도기문화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마을의 자치규약인 대동계를 창설하여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정착된 마을이다.

구림마을 대동계사

구림마을은 신라말기 승려인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신라 말 어느 겨울 성기동 구시바위에서 최씨 성을 가진 처녀가 빨래를 하던 중 냇물에 떠내려 온 참외를 먹고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 숲속 바위에 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곳에 가보니 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며 돌보고 있었다. 다시 아이를 데려와 문수사에 맡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아이가 훗날 풍수사상으로 유명한 도선국사이다. 이후 바위는 국사암, 숲은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을 써서 구림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걸출한 국제 지도자, 사상가의 고향, 국제무역 거점 답게 2022년 11월 이 마을엔 예술과 전통, 인문학이 넘친다.

창녕조(曺)씨, 함양박씨, 연주현씨, 해주최씨, 낭주(영암)최씨가 터 잡은 구림마을은 월출산과 서호 사이에 있다. 대동계 회의, 마을 강학당, 토론장, 훈계실 등 다목적 기능을 하는 사회당 개울 건너편에 조씨 태호종가의 종택과 배향사당, 5개 가문이 마을 공동체의 번영을 도모한 것을 기념하는 ‘대동계사(舍)’가 있다.

구림마을 창녕조씨 종택

구림대동계는 1565년 조선 명종 때 창설되어 약 4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임진왜란때 잠시 활동이 끊겼는데, 뜻있는 선비와 주민들이 의병으로 나아갔다.

이웃 산청에선, ‘삼동에 베옷입고..’ 시조로 유명한 창녕조씨 종가의 조식(曺植)이 의병장 정인홍, 곽재우를 길러내 임진왜란때 남부지방 방어하는데 기여한 가운데, 영암 구림촌의 태호공 조행립은 임란때 어머니 선산임씨 등 가족을 이곳에서 지켜냈고,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엔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사헌부 감찰, 익산 군수 등을 거친 후 낙향, 구림대동계 재조직을 주도했다.

상대포에서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대동계사 쪽 마을길로 접어들면 400년 넘게 보존된 창녕 조씨 종택과 죽정서원은 물론이고 울창한 솔숲 사이에 있는 회사정이 수려한 자태를 마주한다. 회사정은 대동계 장소 등으로 활용되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독립운동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벽이나 방, 난간이 없이 기둥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마을 내에는 한옥 민박시설이 대규모로 조성되어있으며 전통혼례, 짚풀 공예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조선시대 서예가로 이름난 한석봉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이 마을에서 어머니와 글쓰기, 떡 썰기 시합을 했다고 전해진다.

영암 연주현씨 죽림정. 동백, 벽오동, 숙종이 하사한 회화나무가 입구에서 반긴다 [남도일보]

구림마을은 5개 가문과 백성들이 공동체정신 함양, 미풍양속 정립, 반상을 초월한 인본주의 부활, 경제번영 등을 도모한 ‘월출 르네상스’의 중심이다.

월출산 동쪽 활쏘기 훈련장이 있던 활성산 아래 영암읍 장암리는 미풍양속을 지키고 마을 자치를 위해 조직된 대동계를 350여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남평문씨 집성촌이다.

월출산 북쪽, 벽화가 아름다운 모정마을은 운호 호수와 원풍정이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하는 평산신씨, 광산김씨의 집성촌이다. 수백년 공동체 문화를 잘 가꾸더니 오늘날에도, 해맞이 달맞이 명소, 전남 마을숲 콘테스트 대상, 전남도 행복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반찬사업 대상, 참 살기 좋은 마을로 선정되는 등 맛-멋-흥이 조화롭다.

덕진면 영보촌은 여민동락의 향약 동계와 향촌문화가 꽃 핀 곳이다. 평생을 공직에 투신하다 은퇴후 상생의 공동체의 단초를 제공한 전주최씨 연촌(존양) 최덕지(1384~1455)의 손길이 세심하게 닿은 마을이다.

최덕지 선생의 초상 [국가지정 보물]

흉년에 고통받는 백성에게 구휼미를 베풀기 위해 논공법이라는 세법을 상소해 세종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관직을 그만두고 처가인 전남 영암 영보촌에 낙향했는데, 문종이 다시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올랐다.

67세되던 1451년 연로함을 이유로 사임하자 사육신 등 당대 석학과 중신 28명이 노량진나루터에 나와 시부(詩賦)를 지어 칭송하며 송별했다고 한다. 왕명으로 제작된 그의 초상화는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영암의 존양사(녹동서원), 전주의 서산사, 남원의 주암서원 등에서 그를 배향하고 있다.

최덕지와 그 사위 신후경(거창신씨)이 지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 영보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지만 후손 최정, 신천익 등이 중건해 역사성과 조형미, 기술성 등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친족들 중심의 동족계가 유지되면서 전체 동민을 포괄하는 동약으로 발전한다. 동족계가 10석, 동약에서 20석을 출연, 거액을 펀딩해 호국,상생,구휼등에 활용했다.

양반가 후손 최동림이 1932년 소작쟁의를 주도한 것만 보아도 반상을 초월한 영보동계의 나눔정신을 엿볼수 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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