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보릿고개 구제한 ‘의인 뱃사공’…박호련을 아십니까

입력 2022.11.3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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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광주광역시 옛 '서창나루 뱃사공' 박호련, 1920년대 보릿고개 주민 구제"
- "박호련, 뱃사공인데도 이재 밝아..1925·1929년 곡식 풀어 이웃 구제"
- "박호련 선행, 1930년 당시 '중외일보'에 기사로 실려"
- "서창 면민들, 박호련 선행 기리는 '시혜불망비' 세워"
- "광주에 관찰사 등 기리는 비 많지만 주민이 세운 '가장 아름다운 비'로 평가"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정길훈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GBkOXDOxKJQ


◇ 정길훈 앵커 (이하 정길훈):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죠.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자리 함께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정길훈: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지난주에는 무등산의 성자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선생님의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오늘은 서창나루의 마지막 뱃사공이었던 박호련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정길훈: 광주 서창나루의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 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저는 박호련 씨 이름을 처음 듣는데요. 일단 서창나루라고 하면 지금의 광주 서창동 일대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서창이라는 지명이 궁금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 노성태: 서쪽에 있는 창고라고 하는 뜻이죠. 그러니까 고려, 조선시대 때 소금과 세곡, 조세로 바치는 곡식인데요. 이것을 실어 날랐던 곳은 육로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이니까 강과 바다였거든요. 그러니까 강과 바닷가는 고려, 조선시대 때 물류의 대동맥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초 광주는 세곡의 중간 집하장인 나주 영산포까지 세곡을 운송했는데 그 출항지가 된 광주에 세곡 창고가 2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금 첨단지구 산월초등학교 옆에 있는 무양공원 일대에 동창(東倉)이 있었고요. 동쪽 창고지요. 또 하나는 동구, 서구, 남구, 광산구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했던 서창(西倉)이 있었습니다. 그 서창인 것이지요.

규장각 '지방지도' 속 서창동 일대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규장각 '지방지도' 속 서창동 일대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정길훈: 나라의 세곡을 모아놓았던 곳이 서창이었군요. 이 서창 일대가 조선시대에는 여행자와 하급 관리들을 위한 여관, 그러니까 원(院)이 있었던 자리라면서요?

◆ 노성태: 네. 조선시대 때나 고려시대에 역원제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역(驛)은 지금과 같은 역이고요. 말이 있었던. 그리고 원은 일종의 지금으로 말하면 여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1879년 '광주 읍지'를 보면 창고가 있었던 서창 자리는 원래 극락원이라고 하는 원이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급 관리나 여행자를 위한 일종의 여관인데 초기 고려시대에는 불교국가였잖아요. 그래서 절에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역원의 운영이 활발했던 시절 광주에는 경양역, 서남역 등 역이 2개가 있었고 또 원은 10개 정도가 있었는데 극락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정길훈: 서창에 있었던 역이 극락원이네요. 극락원의 극락은 사실 불교 용어 아닙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앵커가 말한 대로 극락원의 극락은 불교 신자들이 마지막 사후 세계에 가고 싶어 했던 곳이 극락세계의 극락인데요.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붙은 원은 극락원 말고도 광주전남 지역에 몇 개가 더 보입니다. 장성 진원면에 선원(禪院)이 있었고요. 그리고 장성 북이면 원덕리에 미륵원(彌勒院)이라고 하는 원이 있었고 그리고 나주 대호동 율정마을에 다산 정약용이 형 정약전과 헤어졌다는 곳입니다. 율정마을에 연화원(蓮花院) 등 불교 관련 이름이 붙었던 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런 불교 순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역사적 흔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길훈: 저희가 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편 유교국가였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극락원이 나중에는 이름이 바뀔까요?

◆ 노성태: 조선시대에 모든 것이 유교적으로 바뀌지만 한번 붙어버린 지명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일상적인 지명으로 정착이 됩니다. 바뀌지 않았다는 거죠. 서창도 한때는 극락창으로 불렸고요. 아무튼 서창 창고 자리가 위치했던 여관 극락원은 그 앞을 흐르는 강 이름마저 극락강으로 바꾸어버리지요. 그리고 그 강을 건너는 나루는 극락진,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하는 서창나루로 불리게 됩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는 극락원의 극락은 바뀌지 않고 지명 이름으로 굳어졌고 그리고 지금 광주 북구 쪽에 흐르는 영산강의 한 지류가 극락강으로 불리게 되는데 극락강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 정길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창나루 이야기를 해보지요. 옛 서창나루, 현재는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노성태: 극락진, 진이 나루잖아요. 현재 지번으로 보면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4번지 일대입니다. 광주에서 송정으로 가는 도로 지나는 다리에 놓인 다리가 극락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극락진이 있었던 곳은 이 자리가 아니고 그 밑에 조금 내려가면 서창교가 또 있는데 서창교 일대입니다. 극락원은 이미 살핀 것처럼 어느 시점인가 세곡을 보관했던 서창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리고 서창 창고가 극락원 자리를 대신해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인근의 서창나루터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루터가 있기 때문에 영산포로 이동할 수 있었겠지요? 조선 초기부터 극락진은 광주 읍내와 전라도 서남쪽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실제로 서창나루는 광주의 남쪽이나 서쪽 지역 그러니까 나주, 송정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거나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었던 거죠.

◇ 정길훈: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서창나루의 뱃사공 박호련 씨인데요. 박호련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한데 어떤 분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박호련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박호련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노성태: 세곡을 모은 창고가 있었던 서창에서 배를 불린 사람은 창고 곡식으로 고리대금업을 했었던 창고지기뿐이었고요. 주변 주민은 가뭄과 홍수, 고리대로 늘 배를 주려야 했는데 그중 한 사람,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박호련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빚쟁이에게 시달리게 되자 야반도주해서 몇 해 동안 타향을 전전한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천한 일이었던 나루터 뱃사공이 그의 몫이 된 이유지요.

◇ 정길훈: 뱃사공 박호련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이 그가 베푼 선행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가난해서 야반도주까지 했던 사람이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 그 과정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박호련이 서창나루 뱃사공이었던 시절이 1920년대였는데 뱃삯으로 받은 돈을 반은 농사로 반은 상업으로 불렸는데 재물을 늘리는 데 소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법 큰 돈을 벌게 됐고요. 젊어서 고생하면 나이 들어 보통 인색해진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박호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릿고개 때마다 곡식을 풀어서 배를 곯은 이웃을 구제하게 되는데 그의 대가 없는 선행 이것이 중외일보 1930년 1월 22일자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중외일보 기사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중외일보 기사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정길훈: 박호련 씨의 미담 기사가 당시 신문인 중외일보 기사로 또 실렸군요. 당시에는 서창 면민들이 박호련 씨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비도 세웠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서창 면민들은 굶주릴 때 도와줬던 박호련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1925년 그리고 1929년 두 번에 걸쳐서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라는 비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 서창파출소 건너편에 박호련 시혜불망비 2개가 함께 서 있는 이유입니다. 시혜불망비의 시혜 뜻은 베풀어준 은혜다 이런 뜻이고요. 불망이라고 하는 것은 잊지 않겠다고 하는 의미이니까 시혜불망비라고 하는 것은 베풀어준 따뜻한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가슴속에 새기겠다 이런 뜻의 의미를 담은 비가 되겠습니다.

◇ 정길훈: 노 원장께서는 평소 박호련의 시혜불망비를 가장 아름다운 비라고 말씀하고 다닌다고 하던데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노성태: 시혜불망비는 그 자체로 감동이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의 비가 있습니다. 광주공원 뒤편에 보면 전라도관찰사라든가 광주 목사, 군수 그리고 역장이었던 찰방 등을 기리는 수많은 선정비가 있고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는 억지춘향 격으로 세워졌고요. 또 다수는 재임 중에 정치를 얼마나 잘했는지와 관계없이 아랫사람들이 세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비에는 따뜻함도 진정성도 또 감동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살펴본 것처럼 박호련을 기리는 시혜불망비에는 서창 면민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고마움을 전하는 진정성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관찰사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보다는 작고 볼품이 없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 감동적인 비라고 생각하는 거죠.

◇ 정길훈: 박호련이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서창나루, 현재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 노성태: 옛날 극락진 그러니까 서창나루는 우리에게 지금은 잊힌 나루터입니다. 큰 서창교가 놓였고 위에는 극락교라고 하는 다리가 놓였기 때문에 더 이상 나루터도 필요가 없게 되고 날랐던 나룻배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박호련의 시혜불망비나 지명으로 남은 서창만이 남아서 옛 극락진, 서창나루 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뿐인데요. 그러나 세곡을 보관했던 창고가 있었고 또 나루터가 있어서 북적대던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서창의 모든 기억마저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 나루터를 지났고 더러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500년 전 조선 문장가인 장유가 극락원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해서 당시 500년 전의 극락진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장유의 시 내용 일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 노성태: '광활한 들녘 한눈에 들어오고 가로질러 흐르는 두 줄기의 강물 장대하여라. 광주와 나주의 경계 가던 길 멈추고 잠시 역참에 멈춰 서니 길가엔 찔레꽃 향기가 가득하여라.' 찔레꽃 향기가 가득했다고 하는 것 보니까 여름철 어느 시점에 장유가 극락진을 건넜고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시인의 감성이 묻어나는 시였네요.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정길훈: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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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보릿고개 구제한 ‘의인 뱃사공’…박호련을 아십니까
    • 입력 2022-11-30 14: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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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 옛 '서창나루 뱃사공' 박호련, 1920년대 보릿고개 주민 구제"<br />- "박호련, 뱃사공인데도 이재 밝아..1925·1929년 곡식 풀어 이웃 구제"<br />- "박호련 선행, 1930년 당시 '중외일보'에 기사로 실려"<br />- "서창 면민들, 박호련 선행 기리는 '시혜불망비' 세워"<br />- "광주에 관찰사 등 기리는 비 많지만 주민이 세운 '가장 아름다운 비'로 평가"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정길훈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GBkOXDOxKJQ


◇ 정길훈 앵커 (이하 정길훈):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이죠.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자리 함께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정길훈: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지난주에는 무등산의 성자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선생님의 따뜻한 삶의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오늘은 서창나루의 마지막 뱃사공이었던 박호련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정길훈: 광주 서창나루의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 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저는 박호련 씨 이름을 처음 듣는데요. 일단 서창나루라고 하면 지금의 광주 서창동 일대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서창이라는 지명이 궁금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 노성태: 서쪽에 있는 창고라고 하는 뜻이죠. 그러니까 고려, 조선시대 때 소금과 세곡, 조세로 바치는 곡식인데요. 이것을 실어 날랐던 곳은 육로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이니까 강과 바다였거든요. 그러니까 강과 바닷가는 고려, 조선시대 때 물류의 대동맥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초 광주는 세곡의 중간 집하장인 나주 영산포까지 세곡을 운송했는데 그 출항지가 된 광주에 세곡 창고가 2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금 첨단지구 산월초등학교 옆에 있는 무양공원 일대에 동창(東倉)이 있었고요. 동쪽 창고지요. 또 하나는 동구, 서구, 남구, 광산구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했던 서창(西倉)이 있었습니다. 그 서창인 것이지요.

규장각 '지방지도' 속 서창동 일대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정길훈: 나라의 세곡을 모아놓았던 곳이 서창이었군요. 이 서창 일대가 조선시대에는 여행자와 하급 관리들을 위한 여관, 그러니까 원(院)이 있었던 자리라면서요?

◆ 노성태: 네. 조선시대 때나 고려시대에 역원제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역(驛)은 지금과 같은 역이고요. 말이 있었던. 그리고 원은 일종의 지금으로 말하면 여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1879년 '광주 읍지'를 보면 창고가 있었던 서창 자리는 원래 극락원이라고 하는 원이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급 관리나 여행자를 위한 일종의 여관인데 초기 고려시대에는 불교국가였잖아요. 그래서 절에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역원의 운영이 활발했던 시절 광주에는 경양역, 서남역 등 역이 2개가 있었고 또 원은 10개 정도가 있었는데 극락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정길훈: 서창에 있었던 역이 극락원이네요. 극락원의 극락은 사실 불교 용어 아닙니까?

◆ 노성태: 그렇습니다. 앵커가 말한 대로 극락원의 극락은 불교 신자들이 마지막 사후 세계에 가고 싶어 했던 곳이 극락세계의 극락인데요.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 붙은 원은 극락원 말고도 광주전남 지역에 몇 개가 더 보입니다. 장성 진원면에 선원(禪院)이 있었고요. 그리고 장성 북이면 원덕리에 미륵원(彌勒院)이라고 하는 원이 있었고 그리고 나주 대호동 율정마을에 다산 정약용이 형 정약전과 헤어졌다는 곳입니다. 율정마을에 연화원(蓮花院) 등 불교 관련 이름이 붙었던 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런 불교 순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역사적 흔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길훈: 저희가 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편 유교국가였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극락원이 나중에는 이름이 바뀔까요?

◆ 노성태: 조선시대에 모든 것이 유교적으로 바뀌지만 한번 붙어버린 지명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일상적인 지명으로 정착이 됩니다. 바뀌지 않았다는 거죠. 서창도 한때는 극락창으로 불렸고요. 아무튼 서창 창고 자리가 위치했던 여관 극락원은 그 앞을 흐르는 강 이름마저 극락강으로 바꾸어버리지요. 그리고 그 강을 건너는 나루는 극락진,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하는 서창나루로 불리게 됩니다. 아무튼 조선시대에는 극락원의 극락은 바뀌지 않고 지명 이름으로 굳어졌고 그리고 지금 광주 북구 쪽에 흐르는 영산강의 한 지류가 극락강으로 불리게 되는데 극락강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 정길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창나루 이야기를 해보지요. 옛 서창나루, 현재는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노성태: 극락진, 진이 나루잖아요. 현재 지번으로 보면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4번지 일대입니다. 광주에서 송정으로 가는 도로 지나는 다리에 놓인 다리가 극락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극락진이 있었던 곳은 이 자리가 아니고 그 밑에 조금 내려가면 서창교가 또 있는데 서창교 일대입니다. 극락원은 이미 살핀 것처럼 어느 시점인가 세곡을 보관했던 서창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리고 서창 창고가 극락원 자리를 대신해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인근의 서창나루터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루터가 있기 때문에 영산포로 이동할 수 있었겠지요? 조선 초기부터 극락진은 광주 읍내와 전라도 서남쪽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실제로 서창나루는 광주의 남쪽이나 서쪽 지역 그러니까 나주, 송정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거나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었던 거죠.

◇ 정길훈: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서창나루의 뱃사공 박호련 씨인데요. 박호련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한데 어떤 분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박호련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노성태: 세곡을 모은 창고가 있었던 서창에서 배를 불린 사람은 창고 곡식으로 고리대금업을 했었던 창고지기뿐이었고요. 주변 주민은 가뭄과 홍수, 고리대로 늘 배를 주려야 했는데 그중 한 사람,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박호련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빚쟁이에게 시달리게 되자 야반도주해서 몇 해 동안 타향을 전전한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천한 일이었던 나루터 뱃사공이 그의 몫이 된 이유지요.

◇ 정길훈: 뱃사공 박호련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이 그가 베푼 선행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가난해서 야반도주까지 했던 사람이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 그 과정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박호련이 서창나루 뱃사공이었던 시절이 1920년대였는데 뱃삯으로 받은 돈을 반은 농사로 반은 상업으로 불렸는데 재물을 늘리는 데 소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법 큰 돈을 벌게 됐고요. 젊어서 고생하면 나이 들어 보통 인색해진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박호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릿고개 때마다 곡식을 풀어서 배를 곯은 이웃을 구제하게 되는데 그의 대가 없는 선행 이것이 중외일보 1930년 1월 22일자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중외일보 기사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정길훈: 박호련 씨의 미담 기사가 당시 신문인 중외일보 기사로 또 실렸군요. 당시에는 서창 면민들이 박호련 씨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비도 세웠다면서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서창 면민들은 굶주릴 때 도와줬던 박호련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1925년 그리고 1929년 두 번에 걸쳐서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라는 비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 서창파출소 건너편에 박호련 시혜불망비 2개가 함께 서 있는 이유입니다. 시혜불망비의 시혜 뜻은 베풀어준 은혜다 이런 뜻이고요. 불망이라고 하는 것은 잊지 않겠다고 하는 의미이니까 시혜불망비라고 하는 것은 베풀어준 따뜻한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가슴속에 새기겠다 이런 뜻의 의미를 담은 비가 되겠습니다.

◇ 정길훈: 노 원장께서는 평소 박호련의 시혜불망비를 가장 아름다운 비라고 말씀하고 다닌다고 하던데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사진 출처: 광주 서구문화원
◆ 노성태: 시혜불망비는 그 자체로 감동이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의 비가 있습니다. 광주공원 뒤편에 보면 전라도관찰사라든가 광주 목사, 군수 그리고 역장이었던 찰방 등을 기리는 수많은 선정비가 있고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는 억지춘향 격으로 세워졌고요. 또 다수는 재임 중에 정치를 얼마나 잘했는지와 관계없이 아랫사람들이 세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비에는 따뜻함도 진정성도 또 감동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살펴본 것처럼 박호련을 기리는 시혜불망비에는 서창 면민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고마움을 전하는 진정성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관찰사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보다는 작고 볼품이 없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 감동적인 비라고 생각하는 거죠.

◇ 정길훈: 박호련이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서창나루, 현재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 노성태: 옛날 극락진 그러니까 서창나루는 우리에게 지금은 잊힌 나루터입니다. 큰 서창교가 놓였고 위에는 극락교라고 하는 다리가 놓였기 때문에 더 이상 나루터도 필요가 없게 되고 날랐던 나룻배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박호련의 시혜불망비나 지명으로 남은 서창만이 남아서 옛 극락진, 서창나루 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뿐인데요. 그러나 세곡을 보관했던 창고가 있었고 또 나루터가 있어서 북적대던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서창의 모든 기억마저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 나루터를 지났고 더러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500년 전 조선 문장가인 장유가 극락원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해서 당시 500년 전의 극락진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장유의 시 내용 일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 노성태: '광활한 들녘 한눈에 들어오고 가로질러 흐르는 두 줄기의 강물 장대하여라. 광주와 나주의 경계 가던 길 멈추고 잠시 역참에 멈춰 서니 길가엔 찔레꽃 향기가 가득하여라.' 찔레꽃 향기가 가득했다고 하는 것 보니까 여름철 어느 시점에 장유가 극락진을 건넜고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 정길훈: 시인의 감성이 묻어나는 시였네요.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정길훈: 지금까지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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