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의 팔레트에서 묻어나는 생동감[김정수의 시톡](16)

입력 2022. 11. 30. 14:05 수정 2022. 11. 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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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시인의 첫 시집 <알바니아 의자>
‘오래’라는 말에는 여러 결의 색깔이 스며 있습니다. 손때가 묻은 물건에선 애착이, 안방에 걸린 흑백사진에선 저릿하고도 아련한 그리움이, 낡은 간판에선 먼지 쌓인 추억이, 무너진 성벽에선 영욕이, 한결같이 지지해주는 사람에게선 친근한 믿음이, 그리고 누렇게 바랜 책에선 삶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오래된 것들은 필연적으로 낡습니다. ‘오래’는 물리적인 시간이고, ‘낡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건이 헐고 허름해지는 것입니다. 색이 바래는 것이지요. 시도 오래 묵히면 물건처럼 낡습니다.

정정화 시인(왼쪽)과 <알바니아 의자> 표지 / 걷는사람


등단 28년 만에 펴낸 첫 시집

등단한 지 28년 만에 첫 시집을 내다니, 늦어도 한참 늦었지요. 이번에 〈알바니아 의자〉를 펴낸 정정화 시인(1973~ ) 이야기입니다. 1994년 제1회 ‘시와반시’ 신인상을 받은 나이가 스물두 살입니다. 엄청 이른 나이에 등단하고, 엄청 늦게 첫 시집을 낸 셈이지요. 한데 시집에서 ‘낡은’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낡기는커녕 알바니아 국기의 붉은 바탕색처럼 강렬합니다. 문정희 시인의 추천사처럼 “원색으로 가득 채워진 팔레트” 같은 시집입니다. “안이한 정서나 지적 포즈에 길들지 않은 염색공이 붓과 펜을 번갈아 집어 들고 간절한 호흡”으로 시와 그림을 동시에 완성해가듯 생동감이 넘치지요.

‘시인의 말’에 의하면, 아직 뚜껑조차 열지 못한 시의 물감이 많다고 합니다. 너무 오래돼 굳어버린 것들도 꽤 있다고 하네요. 온 힘을 다해도 열리지 않는 물감도 있지만, 대부분 가만히 두드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열린다고 합니다. 쉽게 열리는 물감은 시가 흘러나올 때가 됐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래도 굳어버린 세월이 너무 깁니다. 아마 28년 전에도 시의 물감을 팔레트에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팔레트의 “초록색이 점점 닳아”(‘아침의 피아노’)졌을 것이고, 쏟아놓고 쓰지 않은 다른 물감들이 차츰 굳어갔겠지요. 초록색에 대한 편애나 집착은 다른 색의 소외로 이어지고, 고민과 갈등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때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요. 잠시 시를 내려놓고 대학 극작과에 진학해 연극과 영화에 빠져 살았다는군요. 결혼하고 애를 낳아 키우면서 관심은 그림으로 이동합니다. 내면 깊숙이 숨겨두었던 ‘화가의 꿈’을 펼칩니다. 그렇게 20년간 그림만 그리면서 7차례 개인전과 대한민국회화대전, 나혜석미술대전 등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답니다.

오래 한쪽으로 밀쳐놓았던 시가 다시 찾아온 건 대학원 문창과에 입학하면서라는군요. 사실 남편도 시인이라 쓰지만 않았을 뿐, 시를 늘 곁에 두고 살아온 시인입니다. 정정화 시인은 “이 집에 이사 오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밤이 있는 집’)해 “공룡알 같은 이상한 용종”(‘파란 줄을 긋는 시간’)으로 몸이 “헝겊처럼 해져 색칠을 해야”(‘콜링 유’)만 했답니다. 한여름에도 내복을 입고 양말을 신고는 잠들어야 했고, 신종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처럼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합니다.

색깔에 조응하고 소리에 순응하고

시인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창작촌 인근에서 남편과 출판사 겸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 계간지 ‘청색종이’ 발간과 시를 합평하는 목요시회도 열고 있습니다. 집필실도 겸하겠지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일찍 책방 문을 닫고 지붕 위에서 탁탁 튀어오르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거나 시를 씁니다. 시인은 손님 대신 빗소리가 책방을 찾아주는 날이라고 합니다. 햇빛 맑은 날이면 책방 앞에 “긴 의자를 내놓”(이하 ‘문래동’)고 “철공소 망치질 소리와 빵 냄새”를 맡거나 가죽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또 오가는 사람들과 “아주 짧은 순간” 지나가는 족제비도 목격합니다. “철제 다락 계단이 세상 끝으로 이어지”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시작되리라” 생각한다네요.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들만 지나간다”고 하여 불가능한 회복이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풀어놓은 시의 물감은 다채롭습니다. 발칸의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경험이 “야생의 문장 속에 뱀 한 마리를 풀어놓은”(‘얼룩무늬 식탁’) 듯합니다. “보라색 벽을 단단하게 칠”(‘알바니아 의자’)하고, “버건디 색 앞치마는 내일을 위해 낮은 부엌에 내려놓”(‘폴란드 그릇’)고, “만지면 만질수록 부서지는 진흙 도자기를/ 크로아티아 어느 좁은 골목에서 구”(‘아침의 피아노’)하고, “그릴 수 있는 소리들을 모두 모아 지나가는 모로코 염료상에게 팔”(‘밤이 있는 집’)기도 합니다. 시 ‘염색공’에선 옥상 텃밭에서 파, 오이 등을 가꾸고 이것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을 ‘염색공’이라 부릅니다. “청색으로 물든 손이 제일 마음”에 드는데, “손바닥은 매일 다른 색이 입혀져 있”기 때문이랍니다. “밤이 오면/ 염료를 끓”이는데, 울트라마린은 흑해를 건너오느라 “긴 여행이 필요”했고, 작은 냄비가 끓기까지 아름다운 시가 태어난다네요. 시인은 특히 “빨강을 자세히 보고 있습니다”(이하 ‘타라에서’). 어디든 피어 있는 빨강은 “쿡 찌르고 꽉 깨무는 문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풀어놓지 않은 물감 중에서 “빨강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할 게 많”다고 합니다.

이번 시집의 시적 공간은 집과 문래동 그리고 발칸입니다. “제일 아픈 곳은 아픈 대로 오래 적어 두”(‘수제 스피커 상점’)고, “죽은 자들의 손톱 같은 흰 문장을 다듬”(‘늪이었을 거야, 아마도’)습니다. “살고 싶은 쪽이어서 원피스를 고”(‘체리 색깔의 가죽 가방’)르고, 식탁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퉁퉁 부은 발로 길을 걷다가 자주 의자에 앉습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엽서”(‘콜링 유’)를 사서 안부를 전하곤 합니다. 시인은 색깔뿐 아니라 소리에도 민감합니다. 그건 아마 “오늘 심장은 1분에 100회를 뛰고”(‘여름이라는 산책’), “두 귀에서 종소리가 울”(‘콜링 유’)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은 색깔에 조응하면서 소리에 순응합니다. 오래 몸에 가득 채운 색깔과 소리를 한동안 시로 풀어낼 것 같습니다. 통영 바다 앞 벤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인은 혼자 중얼거립니다. “오늘 밤 난 음악회에 갑니다/ 아주 먼 곳이 되어 돌아올 생각입니다”(‘통영’).

시인의 말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
배종영 지음·천년의시작·1만원



회차(回次)의 문 앞에서 망연히 돌아선 오래 묵은 청춘의 아쉬움을 이 첫 시집으로 갈음한다.

▲Itaewon 곰팡이꽃 풀 옵션
하여진 지음·포지션·1만원



이사를 나이보다 더 많이 했다. 집 대신 첫 시집을 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내 소유의 집 한칸.

▲그대, 느린 눈으로 오시네
조현정 지음·달아실·1만원



괜찮아? 아직은.
당신께 두 번째 연서를 보낼 수 있어 다행입니다.

▲노래가 날아오른다
박재연 지음·한국문연·1만2000원



생각이 물질이 되기까지 돌아온 먼 거리.관념을 뭉쳐 똑 분지르면 생강나무
꽃향기가 난다. 생강나무꽃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

▲책상 위의 환상
정선영 지음·작가마을·1만원



시 쓰기는 채우고 비우기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머릿속에 들어찬 그것을 비워내는 일이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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