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아플 권리도 없다’ 며 가정 지키신 당신과 추억의 팔씨름

2022. 11. 3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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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 아버지에게

요즘 모 종편에서 팔씨름 챔프를 가리는 프로그램 ‘오버 더 톱’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우람한 사나이들이 굵은 팔뚝을 무기로 격돌하는 모습은 가히 용호상박 그 자체다. 팔씨름은 다른 스포츠와는 달리 복장도 규칙도 단순해서 지루하지 않고 순식간에 승자가 결정되기에 매우 흥미롭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길 때는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진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팔씨름을 자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술 드시고 오신 날은 여지없이 공부하는 나를 불러 “우리 아들 얼마나 컸나 팔씨름 한번 해 볼까?” 하시며 아빠를 이기면 용돈 2만 원을 주겠다고 코밑 솜털이 제법 가뭇하던 중학생인 나를 식탁에 앉히곤 하셨다. 그러나 2만 원은 멀고 멀었다. 마음은 곧 이길 것 같았으나 결과는 연전연패, 시무룩하게 돌아서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큰아들, 오늘 졌지만 미기상으로 2만 원 준다. 잘했어” 하시며 내 등을 다독여 주셨다. 그 후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막상막하의 접전이 이어졌으나 고3이 되자 아버지의 팔은 가늘어졌다. 우리를 키우시던 뿌사리(황소) 같은 근육이 빠져나간 자리마다 주름이 늘고 강렬했던 눈빛은 낮달처럼 힘을 잃어 갔다. 세월 이긴 장사 없다는 말의 의미를 아버지의 팔뚝에서 보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끝내고 아버지와 함께 돼지고기 수육에 막걸리를 마시며 TV를 보는데 마침 ‘오버 더 톱’ 그 프로가 시작되었다. 순간, 아버지는 옛 생각이 나셨는지 “큰아들! 어떠냐 한판?”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좋아요. 근데 아버지, 상금을 거셔야지요?” 하고 내 말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상금? 좋아 10만 빵 하지” 하시곤 팔을 휘저으시며 식탁으로 향하셨다. “잠깐 아버지, 맞짱은 안 되고요. 중팔 잡아 드릴게요” 하며 내가 여유를 부리자 “야, 옛날 무쇠 주먹 박종팔은 알아도 중팔이는 누군지 모른다. 무슨 중팔이야” 하하. 아버지의 재치 있는 아재 개그에 웃음이 나왔다.

심판은 동생이 보았다. 모든 경기엔 심판이 있듯 부자지간에도 거금 10만 원이 걸린 타이틀전이라 객관적인 심판이 필요했다. “아빠, 미리 손목 꺾으면 안 돼요. 손목 펴세요.” 동생은 상금 10만 원에서 심판료 3만 원을 떼고 주겠다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 팔꿈치를 움직여도 안 되고 들어도 안 됩니다” 하며 시~~작을 알렸다. 나는 아버지의 힘에 맞춰 균형을 잡아갔다. 아버지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셨다.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이길 것 같은 슬픈 생각이 들었으나 일부러 안간힘을 쓰는 듯 온몸을 비틀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본능적 승부욕에 팔이 부들거리고 목 핏줄이 거칠게 도드라졌다. 그때 동생은 “아빠, 옛날 청춘을 불러오세요. 조금 더 조금만 더요” 하며 응원을 보냈으나 이미 왕년의 아버지는 없고 70세의 마지막 청춘이 새벽 모닥불처럼 타고 있었다.

30년 후 나도 새벽 모닥불이 될 것이다. 팔뚝 너머 젊음이 사라진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한 줌의 추억을 불빛 속에 던질 것이다. 눈길 머문 자리마다 추억들이 서성거리고 한걸음에 내달리던 밤들은 잠이 덜 깬 추억을 더듬거리며 방랑의 아픈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지요. “가정은 지상의 천국이어야 한다. 고로 가장은 아플 권리도 없다”고요. 맞습니다. 아버지, 행복한 가정을 가꾸기 위해 아플 권리마저 포기하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깊은 뜻을 받들어 큰아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은 가을비가 내립니다. 가족을 위해 청춘을 바치신 그 팔뚝 위로 가을비가 내립니다. 오늘 팔씨름은 아들에게 졌지만 우리 가족의 행복 팔씨름은 아버지의 승리입니다. 벌써 칠순을 맞이하신 아버지, 내년 봄엔 어머니 손 꼬옥 잡고 튀르키예(터키) 성지순례 여행 다녀오십시오. 아홉 살 손주 지안이가 자기 용돈 2만 원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신라호텔 법인영업팀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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