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베 문학, 전쟁 기억 새기는 ‘평화연대\'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30주년(12월22일)을 앞두고 두 나라 문인들이 베트남 하노이에 모여 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아시아문화네트워크(이사장 최지애)와 베트남작가회(주석 응우옌꽝티에우)는 지난 25일 오후 2시(현지시각) 하노이 시내에 있는 베트남작가회 회의실에서 ‘한국과 베트남 양국에 소개된 작품들’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행사에는 한국에서 소설가 현기영·백시종·이대환·방현석·조용호·박지음 등과 시인 김태수·장석남·안현미·김근·김성규, 드라마 작가 주찬옥과 드라마평론가 김민정 중앙대 교수 등 17명과 베트남작가회 회원 5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심포지엄의 환영사에서 응우옌 주석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한국 작가들은 팬데믹 이후 베트남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방문한 최초의 국제 작가단”이라며 “베트남과 한국 작가들 간의 관계, 교류, 협력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모든 면에서 가장 발전된 협력관계”라고 평가했다. 회원 수가 1천명 규모인 베트남작가회는 계간으로 내는 기관지 <쓰고 읽다> 2022년 가을호를 한국문학 특집으로 꾸미기도 했다. 한국문학번역원과 베트남 주재 한국문화원이 함께 기획한 이 잡지는 300쪽이 넘는 분량 전체를 한국문학에 할애했다. 내용은 성석제·김연수·황정은·김애란·김초엽의 단편소설과 이재무·안도현·나희덕·이대흠·김영산·박성우·박소란의 시, 한국문학 평론과 논문, 방현석 인터뷰, 베트남 작가들의 한국 방문기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응우옌 주석은 심포지엄에 앞서 한국 작가들과 함께한 오찬 자리에서 “내년에 한국과 베트남 작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한·베문학평화연대’를 공식 기구로 출범시키고 2024년에는 하노이에서 한국 작가 50여명을 초청해 대규모 심포지엄과 낭독회, 양국 번역 작품 전시회 등을 열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베트남작가회가 한 국가를 상대로 하는 행사로는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베문학평화연대에서는 해마다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 작품 중 한 편씩을 선정해 문학상을 수여하고 수상작은 상대국 언어로 번역 출간할 것 역시 제안한다”고 덧붙였다.
심포지엄 기조발제에서 소설가 현기영은 “베트남과 한국은 전쟁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전쟁의 참혹한 기억은 상당 부분 지워졌다”며 “작가는 전쟁에 대한 집단 기억이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역할, 즉 망각에 저항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소설가 옌바와 한국 작가 조용호는 각각 베트남작가회 기관지의 한국문학 특집호와 한국에 소개된 베트남 작가 및 작품에 관해 발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소설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의 발표였다. 바오닌은 ‘한국의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제목으로 한 발표에서 자신이 2018년 한국 광주에서 독자들과 간담회를 하던 중 어느 독자가 <사이공의 흰옷>의 작가 응우옌반봉에 관해 질문해 깜짝 놀랐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나 역시도 응우옌반봉 작가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자세히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라고만 말할 수 있었다”며 응우옌반봉이 2001년에 80살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덧붙여 소개했다. 바오닌은 “나 역시도 고등학교 시절에 그의 몇몇 작품을 읽었고 수업시간에도 배웠지만, 광주의 독자가 질문한 <사이공의 흰옷>은 그때까지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응우옌반봉이 그런 제목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며 “오히려 고등학교 퇴직 교사로 문학이 아니라 수학을 가르쳤으며 베트남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광주의 독자가 어떻게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소설을 알고 있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독자에게 되물었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독자는 1980년 5·18 광주항쟁 직전 대학 친구의 소개로 <사이공의 흰옷>을 처음 읽었다며, “책은 자그맣고, 종이는 아주 형편없고, 글씨는 읽기 힘들고, 구식 인쇄물에 낱장으로 떨어져 있는 종이를 동여매 놓은 것이어서, 마치 ‘삐라’ 책자 같았다”고 기억을 더듬어 설명했다. 바오닌은 “한국 독자의 말은 아주 놀라웠고 특히 그곳이 광주였기 때문에 큰 감명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2020년이 되어서야 나는 1972년 항미전쟁 시기에 출간된 후 처음으로 재출간된 <사이공의 흰옷>을 읽었다”며 “책을 읽으면서, 1960년대 사이공 대학생들의 고통스러운 투쟁, 피 끓는 영웅적 투쟁을 그린 이 소설이 19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피에 젖은 흰옷’으로 불굴의 영웅적 상징이 되었다는 광주 독자의 말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오닌은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무시무시한 적이었는데 이렇게 친구가 됐다는 게 놀랍고, 그를 위해 우리 문학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데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바오닌의 발표에 이어 김민정 교수는 ‘아름답고 단단한 비극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행한 발표에서 <오징어 게임> <빈센조> <킹덤> <이태원 클라쓰> <디피>(D.P.) 등 최근 한류 흐름을 이끄는 ‘케이(K)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5가지 공식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갑과 을의 수직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그 세계는 영원불변의 시스템이다 △갑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자 악의 축으로서 사이코패스이거나 소시오패스다 △을은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는 슬프고 굴곡진 사연을 가진 사회적 소수다 △드라마 주인공은 반드시 을이어야 한다. 김 교수는 “영화 <기생충>과 소설 <82년생 김지영> 같은 다른 장르의 ‘케이컬처’가 케이드라마와 서로의 알고리즘 역할을 하며 시너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한국 드라마의 임팩트가 유독 큰 까닭은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 많은 역경과 고난을 경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극복해 온 저항의 역사가 ‘브랜드 케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베 문학 심포지엄에 맞춰 도종환 시집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와 방현석 소설집 <세월>이 베트남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두 나라 문인들은 내년에는 한국에서 문학 행사를 열고, 2024년에는 다시 베트남에서 만남을 갖는 등 교류를 정례화할 예정이다.
하노이(베트남)/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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