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법'(法)에서 '물 수'(氵)의 의미와 도덕성의 회복

김경호 호인 대표변호사 2022. 11.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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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호인 대표변호사

한나라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오늘날 사용하는 '법'(法)은 본래 '법'(灋)이라는 글자의 원형에서 '뿔이 하나 달린 괴수'인 해치(廌)를 나타내는 '해치 치'(廌)가 생략되고 삼수변(氵)에 갈 거(去) 자만 남은 글자라고 한다.

'법'(法)이란 글자에 '물 수'(氵)변이 들어간 이유에 대해 필자는 물(水)에 관한 메타포(metaphor)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노자의 (도덕경)을 접목시켜 본다.

노자의 (도덕경) 제8장에 따르면, 물에 관한 비유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나온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의미다. 이때 물(水)의 속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첫째,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자기를 항상 낮춘다는 『겸손(謙遜)』의 미덕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둘째, 물은 생명의 본원(本原)이기 때문에 물이 있어야만 생명이 유지된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셋째, 물은 동시에 홍수의 격랑과 같이 모든 차별을 쓸어 내버리는 강력한 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물 수'(氵)변을 품은 '법'(法)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첫째, 객관적인 이성의 집약체인 '법'(法)은 『겸손(謙遜)』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즉, 수사관이든 검사든 판사든 그 법의 적용의 기본적인 태도는 『겸손(謙遜)』해야 한다.

둘째, 객관적인 시스템의 근본인 '법'(法)은 만물(萬物)을 이롭게 해야 한다. 즉 그 법의 적용 결과는 『공정(公定)』해야 한다. 만인(萬人)이 아닌 만명에게만 그 이로움을 준다면 이는 불공정한 것으로 이미 '법'(法)이 아닌 『사이비 '법'(法)』이 된다.

셋째, 동시에 최고 기득권층이라도 그들의 거대한 부정(不正)에 맞서 홍수의 격랑과 같이 한번에 쓸어 내버리는 강력한 힘도 있어야 진정한 '법'(法)이다. 즉, 법은 신분이 귀한 사람에게 아부하지 말아야 한다(法不阿貴).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앙은 태자가 법을 어기자 태자의 스승을 벌하며 법을 어길 시 태자도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러한 강제력을 갖는 법도 그 뿌리가 있다. 바로 도덕(道德)이다. 『법과 도덕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적인 벤다이어그램의 부분집합 보다는 현실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북극해 수면 위에 올라와 있는 빙하의 예』가 적당하다.

수면 위에 올라와 있는 빙하는 전체 빙하 중에 7분에 1이고 그 밑에 7분에 6의 빙하가 받쳐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7분에 1의 빙하가 수면 위에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법은 일반예방과 특별예방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강제력 있는 공권력이고, 이것이 우리 삶의 수면 위에 항상 떠 올라와 있어 때론 우리 삶을 견제하고 때로 우리 삶을 구속하고 있는데, 그 법이 마치 수면 위에 떠오른 7분의 1의 빙하와 같다면, 그 밑에 7분에 6의 도덕이라는 부분이 충분히 떠받쳐 주어야 그 법이 법답게 강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도덕성의 회복 없이는 강력한 법(法)이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도덕성'은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고, 특히 공무원이 그의 언행의 불일치로 하루 하루 국민의 신뢰를 잃어 버리고도 그 자리에서 계속 민생을 논하고 정치를 하고 있다면, 그 비대해진 법이 도덕성의 뒷받침 없이 그 자신의 무게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고, 그래서 그 법의 강제력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으면 그 조직의 질서가 모두 붕괴되는 현상이 초래될 수 있다.

필자 생각에는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법은 『모래성』에 불과하고, 법의 존재 목적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를 이룩하는, 즉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법은 그 존재 기반도 도덕성이요, 그 추구하는 목적도 도덕성의 회복이므로, 도덕성 없이는 진정한 법을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면, 학교에서 준법교육은 다름 아닌 도덕성의 교육으로 반드시 이어져야 하고, 법을 적용하는 수사관, 검사, 판사는 그 누구보다 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강력한 법만 적용하는 기계로 전락한다면 차라리 인공지능(AI) 수사관, 검사, 판사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정감(情感) 있는 도덕성의 회복 없이는 법은 진정한 법다울 수가 없다. 미국의 『라과디아의 판결』(빵을 훔친 노인에게 벌금형 10달러를선고하면서, 판사 자신에게도 10달러 벌금형을, 노인의 생활이 어려운데도 아무도 돕지 않은 모든 뉴욕시민에게 50센트 벌금형을 선고) 은 바로 도덕적 자신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한국의 『라과디아의 판결』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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