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철의 도쿄레터] 디지털 후진국 벗어나려 17조원 쓰고도 일본 마이넘버카드는 6년째 ‘장롱 카드’
눈 상태가 안 좋아 28일 일본 도쿄 아자부의 안과의원을 찾았다. 마이넘버카드를 건네자 간호사는 “종이로 된 건강보험증을 달라”고 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마이넘버카드는 국민 개개인을 인증하는 신분증으로, 12자리 숫자로 돼 있다. “마이넘버카드에 건강보험증을 등록해 인증되는 걸로 안다”고 했지만, 간호사는 “마이넘버카드를 제시한 환자는 처음 본다. 안 된다”고 했다. 얼굴 사진도 있는 정부 발행 신분증이지만 인증을 못 한다는 것이다. 사진 없이 이름만 적힌 종이 건강보험증을 제출하고서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마이넘버카드는 일본이 디지털 후진국에서 탈피하겠다며 6년 전 ‘최강 한 수(手)’내놓은 카드다. 공문서나 회사 서류에 전자 서명은커녕 결재 도장을 일일이 찍고, 이메일 대신 팩스를 사용하는 아날로그 사회의 벽을 넘기 위해선 ‘국민 식별 번호 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해 11월 추경 예산으로 마이넘버카드 보급에 1조8100억엔(약 17조9300억원)을 투입했다. ‘돈 살포’를 통해서라도 널리 보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마이넘버카드를 신청·취득하면 편의점 등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2만엔(약 19만1000원) 상당의 포인트도 제공했다.
한 달 전 일본인 지인 2명은 “올 초 마이넘버카드를 신청해 2만엔을 득템했다”고 했다. 하지만 “신분증으로 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둘 다 “포인트 받으려고 신청했을 뿐이고, 한 번도 안 써봤다. 지금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현재 일본 정부가 발행한 마이넘버카드는 6735만장에 달한다. 일본 인구의 53.5%다. ‘2만엔 포인트’ 덕분에 지난해 20%에 그쳤던 보급률이 뛰었지만, 내년 3월까지 거의 모든 국민에게 교부하겠다는 당초 목표는 물 건너간 상황이다.
속 타는 당국은 프로 스포츠 경기나 콘서트, 박물관 입장권을 살 때 마이넘버카드와 연계하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일본에선 갖가지 입장권을 주로 편의점의 티켓 판매기에서 구매한다. 얼굴 식별과 같은 절차 없이 이름을 입력하고 돈을 지불하면 티켓이 나온다. 일본 디지털청은 “티켓을 구매할 때 마이넘버카드를 사용하고, 나중에 입장할 때도 출입구에서 마이넘버카드를 제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본인 여부를 확인해 암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전면허증도 장기적으로 마이넘버카드로 통합할 계획이다. 카드 발부를 사실상 강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2024년 가을쯤 건강보험증을 폐지하고 마이넘버카드로 흡수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의 시선은 차갑다. 이달 초 요미우리신문의 여론조사에서 건강보험증 폐지와 마이넘버카드 일원화에 대해 반대(49%)가 찬성(44%)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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