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왕의 온천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 소장 2022. 11.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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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초겨울 바람이 차다. 따뜻한 기운이 그리운 계절이다. 길을 걷다가 핫팩에 시린 손을 녹이는데 온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 목욕탕도 보기 어려운 때, 굴뚝에 남은 흔적이 반갑지만 새삼스럽다. 삼삼오오 온천여행 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지금 세대들이야 온천보다는 찜질방을 떠올리겠지만, 누군가의 신혼여행과 가족여행의 추억이 깃들었을 곳이다. 각광받던 온천 여행지마저 이제는 쇠락한 곳이 많다. 일본 여행 입국 제한이 완화되면서 일본 온천여행 홍보가 거세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왕의 온천’이 등장한 우리의 온천 역사는 깊다. 그 흔적이 부산 동래, 온양, 유성, 이천, 충주 등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그중 온양온천으로 알려진 아산은 옛 지명부터 온기(溫氣)를 품고 있다. 백제 때는 탕정(湯井), 고려에는 온수(溫水)였다가, 조선부터는 온양(溫陽)으로 불린 고장이다.

“온양온천에 헌 다리 모이듯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온양온천은 아픈 다리와 피부병에 좋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조선 태조 때 왕실 온천지로 출발해 세종 시기 왕의 안질과 피부병 치료를 위해 별궁인 ‘온양행궁’을 지었다. 이후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왕과 사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치유차 머문 ‘조선 왕실의 휴양지’였다.

당시 왕의 온천 행차인 온행(溫行), 목욕법, 온천 보양식 등의 기록과 온양행궁의 상세 배치도와 사도세자 활터인 영괴대(靈槐臺)의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온양행궁이 훼손되면서 숙박업소로 전락했다. 지금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친필을 내린 ‘영괴대비’ 등만이 남아 있다.

주변 개발로 온양행궁의 온전한 복원이 어렵다지만, 귀한 유산의 효율적인 보존과 활용이 절실하다. 사도세자 부자의 사연을 담은 활터와 ‘왕의 온천’에서 미역국을 마시며 왕실 목욕법을 따라 즐기는 상상을 해 본다. 깊은 겨울날, 왕이 치유받은 곳을 찾아 온천욕으로 추위를 이기고 온기로 시린 마음을 달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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