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르신 인문학,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첫 강의 때 뭐라도 들고 가야 할 것 같았어요. 박카스 두 박스 사서 한 병씩 나눠드리고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둘째날엔 박카스 대신 요구르트를 가져갔어요. 우리 몸의 심장이 한 번에 뿜어내서 혈관으로 돌게 하는 혈액의 양이 꼭 요구르트 양만큼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였죠. 건강은 숨을 잘 쉬는 것, 좋은 숨을 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취지의 강의였어요.”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에서 진행한 어르신 인문학 강좌에서 김홍표 아주대 교수가 강좌가 마무리된 뒤 강사들 모임에 나와서 밝힌 소회의 한 대목이다. “뭐라도 들고 가야 할 것 같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저는 마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려드리면서 시작했죠.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고요. 한 어르신이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나셨던 모양이에요. 덩달아 저도 눈물이 나서 혼났어요. 도시는 땅과 사람,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는 걸 들려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도시재생 전문가 허현태 박사가 들려준 강의 경험담이다.
“저는 법률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개별적인 질문에 응하다 보니 다른 분들이 소외되는 것 같았고, 질문을 받지 않고 강의하려니 구체성은 떨어지고 추상적인 데다 어려운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어르신 인문학은 참 좋은 기획이고 개인적으로 소중한 경험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시간이었어요.” 김화섭 변호사가 밝힌 소회 중 일부분이다.
중국 이야기를 하기로 한 신승대 회원에겐 강의 전 몇 가지 유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마오쩌둥이 아니라 ‘모택동’, 덩샤오핑이 아니라 ‘등소평’이라 말하라고. 정작 강의 때는 중국요리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가 관심 있게 들어줘서 고마웠다는 소회였다.
판소리 전수자 정유숙씨는 단지 판소리만 들려드리기보다 판소리에 담긴 삶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를 알려드리려고 노력했더니 크게 호응하더라는 거였다. 소통전문가 원호남 교수는 ‘멋진 어르신 대화법’, 강태운 작가의 ‘그림과 나’, 삼성출신 소통강사 안선형씨의 즉석 색소폰 연주와 방송PD 출신 조정선 작가의 멋들어진 기타연주와 ‘대중가요의 역사’를 들려주는 강의는 큰 호응을 얻었다. 건설노동자 출신의 김용우 작가는 ‘중동 건설노동자의 애환’을 들려줘 깊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강좌의 백미는 어르신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시도였다. 화가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작가와 함께 에코백을 만드는 과정을 넣었으며, 무엇보다 어르신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쓸 수 있도록 유도했다. 손혜진 작가와 박성희 작가, 권선근 출판기획자가 참여했고, 이경란 작가가 주임 강사 역할을 했다.
“읽기와 쓰기가 안 되는 어르신이 계셨어요. 읽기 부분은 대신해드렸는데 쓰기는 직접 하셔야 했어요. 민망해하실 줄 알았는데 끝까지 함께해주셨어요. 글을 쓴다기보다 글자 모양을 그리는 방식으로 참여하신 거죠. 뭉클했어요.” 이경란 작가의 후일담에 집담회에 참석한 강사 모두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들 앞에서 과학 이야기를 하려니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라며 엄살, 아니 진짜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했던 김범준 성균관대 교수는 어르신 강의에 이어 대전의 노숙인을 위한 강의까지 소화한 뒤 일약 스타강사가 되기도 했다.
강의를 들으신 어르신과 노숙인들은 한결같이 김범준 교수의 과학강의가 재밌고, 유익했다고 말씀하신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지난 6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 ‘동네 식당과 어르신 인문학’이 도화선이었다. 칼럼을 읽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이 직접 책고집으로 찾아와서 어르신 인문학 강좌를 지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위원회에서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우리가치인문동행 사업의 취지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르신 인문학이 시작됐다. 3곳의 복지관을 찾아가서 수강생을 모집했고, 강사진은 책고집 회원들로 구성했다. 참여한 어르신들 대부분 즐거워하셨고, 강사들은 즐거움에 더해 보람까지 덤으로 챙긴 시간이었다. 어르신 인문학,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이제 시작이다. 내년에는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어르신을 만날 것이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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