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정의와 철학이 사라진 한국 정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종료 5년 뒤, 그의 나이 70세에 받은 재판에서였다.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다,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소크라테스를 보면서 참지식을 사랑하고, 철학적 올바름을 지닌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할 때만 정의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오오. 인간들이여, 너희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지혜가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자각은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이라고 말한 공자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이는 자기 생각만 옳다는 독단을 경계하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고, 새로운 배움으로 나아가는 열린 마음을 지향하기도 한다. 위정자의 지혜가 모자라면 정치는 닫힌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고도의 정치는커녕, 보기에도 민망할 때가 다반사다. 이태원 참사 후, 외신기자회견장에서 웃음과 농담으로 망신을 당한 한덕수 국무총리. 158명의 쓰러진 꽃무덤에 “폼 나게 사표” 망언 인터뷰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정말 웃기고 있던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 그들의 행위는 철학적 올바름에 대한 강한 회의를 불러오며, 정의의 정치가 실현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으로 바뀌고 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는 미 국방성 비밀문서 보도 사건을 핵심으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정부를 상대로 벌인 언론과 권력의 갈등을 그렸다. 소송에 대한 미 대법원의 판결은 명확했다. “언론은 자유를 보장받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다. 언론이 섬기는 건 국민이지, 통치자가 아니다.” 문화방송(MBC)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가 동맹관계를 훼손시킨다며, 국익과 헌법수호 차원의 대응이었다는 대통령의 답변은 지혜로운 판단이었을까? 대통령은 자의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출근길 문답이 이루어졌던 대통령실 청사 1층엔 가림막이 설치됐다. 경호와 보안상의 이유라지만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청와대를 비웠다는 윤 대통령 스스로가 목 터지게 부르짖던 자유에 스스로 커다란 가림막을 씌운 꼴이다. MBC 기자의 태도와 대통령실 참모와의 설전은 출근길 문답의 중단 원인이 되었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던 약속은 언론과 국민 앞에 지금도 그래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통령 부인의 일정은 또 다른 가림막 안에서 진행된다. 캄보디아, 프놈펜 일정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통령실은 심장병 어린이 조명 의혹을 제기한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국익 침해 이유로 경찰에 고발했다. 자유로운 취재가 거부당하면, 진실은 늘 숨바꼭질하는 법이다. 지난 23일 김건희 여사는 케냐 대통령 배우자와 대표취재 기자 없이 환담했다. 대통령실이 던져주는 사진과 브리핑이 전부다. 원단을 가져다 재단하는 건 언론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시침질까지 마친 천을 던져주는 대통령실은 재단사 역할까지 수행한다. 몸에 예쁘게 어울리는지만 봐 달란 얘기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옷을 만들지를 결정하는 건 언론사다. 권력기관이 아니다. 재단사인 기자는 언론사 고유의 브랜드를 만든다. 대통령실의 받아쓰기 언론관이 심히 우려스럽다.
취임 200일이 지났어도, 윤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와의 회동은 없다. 이 와중에 25일 대통령은 관저로 여당 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을 함께했다.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성과와 외교 현안 및 내년도 예산안과 주요 법안처리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수도 없이 불통과 아집에서 벗어나서, 소통과 협치를 통한 정치를 당부했다. 메아리가 없다. 김지하의 시를 꺼내 읽는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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