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 편하게 그림 즐기는 법
“시로는 사천, 그림으로는 겸재가 아니면 쳐주지도 않았다.” 18세기 한때 회자되던 이 말의 주인공은 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이다. 두 사람은 시인과 화가로 이름났을 뿐 아니라 둘도 없는 평생지기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았다. 정선의 유명한 금강산 그림 ‘해악전신첩’이나 한강의 경치를 그린 ‘경교명승첩’ 등이 이병연과 함께한 작품들이다.
이병연은 좋은 그림을 알아보고 소장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동시대의 문인 조귀명은 이병연이 애지중지 수집한 그림을 곧잘 빌려다 보곤 했는데, 어느 날 그림을 돌려주면서 짤막한 글을 써 주었다. “그림을 소장하는 목적은 감상하는 데 있을 뿐이다. 감상으로 누리는 즐거움은 주인이나 객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애초에 구하여 수집하는 어려움이 없고 내내 관리하느라 노심초사 걱정할 일도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주인으로서 고생하느니 객으로서 속편한 것이 낫다. 화가는 소장자를 위해서 일하고 소장자는 감상자를 위해서 아껴둔다. 나는 감상하는 사람이다. 여름날 시원한 집 안에 앉아서 날 저물도록 그림을 펼쳐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이 글을 읽은 이병연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고맙다는 사례나 고상한 감상평을 예상했다가 뜻밖의 내용에 당황하거나 약간은 억울한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제까지 이런 말을 내가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나처럼 하게 되면 내가 그림을 감상할 길이 없게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이제 감상할 만큼 실컷 감상했으니 이 글을 쓴다”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살짝 얄미운 감정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조귀명의 진솔한 장난기에 이내 흐뭇한 미소를 띠게 되지 않았을까?
수시로 다양하게 열리는 전시회와 놀랍게 발달한 디지털 기술 덕분에, 오늘 우리는 마음과 의지만 있으면 훌륭한 미술품들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소장의 번거로움은 남에게 맡기고 그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길이, 조귀명으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만큼 훨씬 많이 열려 있는 셈이다. 물론 아무리 환경이 편하게 바뀐다 해도, 좋은 그림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안목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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