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11월의 사랑은 11월에 끝난다

2022. 11. 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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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모르는 이가 부친 택배처럼 11월이 도착하고, 어느덧 그 내용물은 다 소진된다. 우리 사유재산의 목록에 11월, 불면증, 슬픔 따위는 없다. 그 가치를 도무지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11월에도 내 마음은 잉잉거리는 꿀벌로 가득 찬 꿀벌통 같다. 내 마음은 그토록 많은 희망들로 붐빈다. 나는 자주 강가에 나가 큰 귀를 열어 바람의 노래를 듣는다. 강가에는 야생의 향기 한 점 남지 않은 메마른 공기와 버려진 창고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노래를 잊은 돌들이 구르고, 다만 갈대가 허리가 꺾인 채 서걱거릴 뿐이다.

 11월은 누군가의 택배처럼 온다

우리가 11월의 우울과 사랑을 얘기하는 동안 지병이 있던 벗은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한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보람, 약간의 슬픔, 약간의 어리둥절함, 그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짧고 아름다운 계절이 우리의 슬하를 떠나면 바로 막달이 달려온다. 당신은 11월이 오면, 이라고 입을 여는데, 그 말에 끝맺음이 없었다. 말없음만이 11월의 말이라는 듯 당신 입은 조개처럼 다문다.

11월의 물은 차갑고, 물 위로 가랑잎이 떠간다. 아침에는 올리브 열매와 식빵 몇 조각, 뜨거운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먼 고장의 수도원을 상상한다. 나는 프랑스 생방드리유 드 퐁토넬 대수도원을 가본 적이 없다. 서리 내린 시린 아침의 수도원에는 침묵의 시간이 깃든다. 낯빛 창백한 수사들은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녁의 흠송과 기도 시간까지 침묵은 수행의 한 방편이다. 11월에는 가보지 못한 대수도원을 그리워하고, 그레고리오 성가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오후엔 떫고 달콤한 홍차를 깊이 음미하며 마시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꿋꿋한 윤리다. 홍차에는 달콤한 절망 1인분과 쓰디쓴 희망 1인분, 그리고 비밀스런 슬픔 1인분이 녹아 있다. 나는 양파와 실과 고양이를 사랑하던 당신을 사랑했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잘 알지 못했다. 당신이 떠난 뒤에야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11월에 시작한 사랑은 11월이 가기도 전에 끝난다. 당신 떠난 뒤 내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자랐다.

우리는 마종기 시인의 시와 마야콥스키의 생애, 11월의 안개와 가랑잎, 커피 냄새가 나는 햇빛, 그리고 11월의 정신건강을 화제에 올린다. 가령 마종기 시인의 한 구절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연가 9’)를 외우면 그 시의 아름다운 몇 구절과 내 스무 살이 달려온다.

스무 살의 어느 아침, 나는 미치지 않았고, 자고 일어나서 유명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술과 담배를 못하고, 일찍이 포커도 배우지 못했다. 바람의 기운을 받아 솟구치는 파도의 기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던 의기소침한 청년, 연애도 못 한 채 시립도서관 주위를 맴돌던 그 스무 살 시절 마종기 시인의 시를 미친 듯이 외웠더랬다. 누군가 내 외로운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죽은 친구도 찾지 않고, 그랬으니 죽은 친구가 귓속말로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고 속삭이지도 않았다. 스무 살은 다만 비루하고, 쓸쓸했다.

내 청춘은 소모되고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는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아지는 이즈막 한밤중 깨면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잠 못 이룬다. 한밤중 키가 큰 고요에 귀 기울이면 나를 떠난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를 그들이 나를 부른다. 그들이 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애타게 부르는 것이다.

 키가 자라지 않아도 나이는 늘고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을 사랑했다. 나는 빈센트 반 고흐, 당신의 얼굴을 본다. 얼굴은 가시적인 것의 나타남이고, 벌거벗은 진실의 출현이다. 얼굴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서는 입구다. 슬픔의 왕, 열정의 왕, 상처의 왕, 그 앞에 비누 거품처럼 많은 삶이 있었으나 그걸 다 살기도 전에 고흐는 37세에 죽는다. 죽기 전 “모든 것이 끝나서 좋다”라고 했다지만 고흐의 그림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는 수직으로 솟은 채 녹색의 불길처럼 타오른다.

고흐의 그림에서 열정과 의지, 알 수 없는 현기증이 덮치는 것을 느낀다.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던 고흐의 육체는 “과열된 공장”이다. 안타깝게도 고흐는 아픈 왕이었다. 앙토냉 아르토는 이렇게 썼다. “왕은 자신의 건강의 분출을 알려줄 경보를 품에 안은 채 영원히 잠들었다. 경보는 어떻게 울리는가? 즉, 좋은 건강이란 닳고 닳은 병의 넘쳐남으로, 살려는 엄청난 열정의 넘쳐남으로, 썩은 백 개의 상처로, 또한 어쨌든 살려야 하고, 영원히 살게 해야 한다는 의지로 경보는 울린다.”(<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11월엔 모든 금지를 금지시키자

11월은 활화산이 아니라 터진 뒤의 휴화산이다. 11월을 재와 폐허의 계절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자. 11월에도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아기를 갖는다. 우리는 현관문 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까먹은 자의 난감함으로 11월을 전송한다. 우리는 머리 위로 떨어진 빗방울의 무게를 잰다. 깨진 연애로 발생한 순손실을 덧셈과 뺄셈을 하며 계산을 한다. 그리고 덧없이 아름다운 11월을 떠나보낸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말라. 11월에 소모가 많던 연애가 돌연 깨졌다고 우리는 금치산자처럼 울부짖지는 않는다.

아, 나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별의 궤도를, 이별의 전조를 보고야 만다. 11월에는 모든 금지를 금지시키자. 연애 금지, 슬픔 금지, 절망 금지, 좌절 금지, 실패 금지. 모과나무에서 모과 열매를 다 따 내린 11월 말 저녁, 나는 하염없이 아름다운 산문 한 편을 쓰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하지만 그 실패도 아름답다. 돌이켜보면 11월은 홀로 광야에 서서 매화 향기를 맡을 것 같은 착란의 계절이다. 삶의 성분은 얼마간의 착란, 얼마간의 유치함, 얼마간의 고매함이 아니던가! 11월에 필요한 것은 담요와 보온양말, 그리고 약간의 사랑이다. 우리에게 화살기도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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