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아우른 ‘친구 부자’ 비결은 따뜻한 인품이었죠”

한겨레 2022. 11. 2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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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 월 11 일 , 류석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64. 선생님의 첫 박사 제자로서 25년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선생님을 지켜봤다.

1999년 나와 선배 둘이서 '아이티 정치연구회' 세미나 모임을 꾸렸을 때 기꺼이 지도교수를 맡아준 선생님은 외국 출판물까지 찾아 발제하고 토론에 적극 참여했고, 함께 논문과 책을 써내며 독려해주셨다.

선생님이 즐겨 쓰던 유일한 영어 표현 '디센트'(decent·괜찮은, 기품 있는, 적절한)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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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고 류석진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를 기리며
고 류석진(왼쪽 둘째) 교수와 필자(왼쪽 셋째)를 비롯한 제자들이 2015년 중국 칭타오 중국해양대학을 견학했을 때 모습이다. 조희정 연구원 제공

지난 11 월 11 일 , 류석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64. 선생님의 첫 박사 제자로서 25년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선생님을 지켜봤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선생님의 훌륭한 인품 , 뜨거운 연구 활동 그리고 왕성한 사회참여 활동을 완벽하게 회상하기에는 한참 모자르다 .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가장 강력하게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가장 유연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분이셨다. 진보와 보수 경계를 넘어 친구가 그만큼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차고 넘칠 정도의 따뜻함을 주변에 전했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문제해결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을 마치 의무처럼 성실히 했고, 타인의 좋은 일을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널리 알리기를 좋아하셨다. 거의 강박관념처럼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하지 않으셨던 것도 선생님의 특징이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토론을 즐기는 토론의 아이콘이었다. 선생님이 계신 자리는 어디에서나 세미나가 열렸다. 그럴 때면 ‘선생님이 소크라테스에요? 맨날 토론이 너무 많아요’ 라면서 툴툴 거렸다. 그러나 좋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메모를 하다하다 지쳐서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걸 입력해서 이튿날 메일로 보내드리곤 했다. 선생님은 그 자료들을 소중히 모아 계속 확인하고 다음 토론의 진행자료로 활용해주셨다. 그렇게 일상적으로 지도편달의 교육과정을 경험했으니 가장 복 많은 제자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사회적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하나, 1970년대 중반 서울대 학부 시절의 야학 교사 활동이 가장 먼저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유명인들이 그 시절 야학 동료들로, 여전히 끈끈하게 연락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무척 열정적으로 참여하신 듯하다. 둘, 1997년부터 한국 평화디딤돌과 일본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에서 함께 진행한 ‘동아시아 워크숍’을 통해 강제징용자 유골 발굴 활동을 적극 추진하셨다. 민간 주도의 자발적인 활동에 선후배 제자들도 힘을 보탰고, 선생님은 늘 응원해주셨다. 셋, 촛불집회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셨다. 2002년부터 광화문 일대에서 시작된 촛불집회 현장에 거의 매일 나가 어린 학생들부터 어르신들까지 소탈한 어투로 참여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의미를 연구했다. 넷, 아이티(IT)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 1999년 나와 선배 둘이서 ‘아이티 정치연구회’ 세미나 모임을 꾸렸을 때 기꺼이 지도교수를 맡아준 선생님은 외국 출판물까지 찾아 발제하고 토론에 적극 참여했고, 함께 논문과 책을 써내며 독려해주셨다. 다섯, 뜻있는 단체나 모임을 수없이 후원하고, 실무자처럼 나서서 때로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해 동참하게 하셨다. 여섯,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물론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정말 화끈하게 지원하셨다. 그 덕에 선생님이 소장을 맡아온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정치학을 넘어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가 늘 열렸다.

정치적 성향에 대한 짓궂은 물음에 선생님은 “난 좋은 정부를 원한다” 는 말로 대신하셨다. 답을 비켜가는 것 아니냐는 나의 독한 멘트에도 언제나 굳건하게 같은 말을 고수하셨다. 뭐든 과한 것을 싫어하셨고  사람을 볼 때 늘 장점을 먼저 발견하셨고, 용기를 잃은 이들의 등을 두드려주셨다.

선생님이 즐겨 쓰던 유일한 영어 표현 ‘디센트’(decent·괜찮은, 기품 있는, 적절한)가 떠오른다. 선생님이 떠나시고 나니,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는 것을 새삼 분명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디센트한 인간 류석진’을 회고하기에는 짦은 글로 대신할 수 없는 기억들이 너무나 많이 떠오른다.

조희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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