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선박 교체 특수·원유 물동량 증가…내년 ‘유조선’ 주문 몰려온다
물동량 기지개에도 유조선 수 크게 모자라 운임은 가파른 상승세
삼성중공업·케이조선 등 잇단 수주…국내 조선업계, 호황 기대감
신년에는 국내 조선소들이 밀려드는 ‘오일탱커(유조선)’ 주문으로 바쁜 한 해를 보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원유 항로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고 있는 데다, 노후 유조선 교체 수요까지 몰릴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올 한 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을 휩쓸며 오랜 불황의 늪에서 벗어난 한국 조선업이 내년에는 탱커 수주로 날개를 달 것으로 기대된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조선사들은 최근 잇달아 탱커 수주 소식을 전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22일 그리스 선주사 ‘차코스에너지내비게이션’과 셔틀탱커 2척에 대한 건조계약을 맺었다. 셔틀탱커는 해상에서 생산한 원유를 육상의 석유 기지로 실어나르는 유조선이다. 수주액은 총 3466억원으로 2025년까지 인도될 예정이다. 케이조선도 지난 11일 중동지역 선사로부터 중형 탱커 4척을 수주했다. 대한조선도 지난 9월과 10월 수에즈막스급(13만~15만t급) 탱커 2척, 아프라막스급(8만~11만t급) 탱커 2척을 각각 수주했다. 특히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은 지난 1년6개월 동안 세계적으로 발주가 한 건도 없던 것을 이번에 대한조선이 처음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탱커는 원유·석유정제품·화학제품 같은 액체화물을 운반하는 선박을 말한다. 탱커는 일반적으로 유조선을 가리킨다. 원유운반선 건조 시장은 2020년 이후 내내 침체기였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사업 전망에 불확실성이 잔뜩 끼면서 선주들이 투자금이 많이 필요한 선박 교체를 미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말 이후로는 탱커 시장의 ‘슈퍼사이클’이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첫번째 요인이다. 오는 12월5일부터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금지 조치를 시행한다. 가까운 러시아가 아닌 서아프리카·미국·중동 등에서 새로운 원유 공급처를 찾기 시작하면서 항로가 대폭 늘어나게 됐다. 러시아 또한 유럽으로 넘기던 원유 물량을 중국·인도 등으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톤마일(화물의 중량과 이동거리를 곱한 값)이 대거 높아졌다.
이를 반영하듯 원유운반선 운임은 가파른 상승세다. 글로벌 수요 둔화로 컨테이너·벌크선 등의 화물선 운임은 뚝뚝 떨어지는데, 유조선 시황만 ‘나 홀로’ 강세다. 대표적인 탱커 운임 지표인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중동-중국 운임지수(WS)는 지난 18일 기준 130이다. 지난 1월 첫째주의 36에 비해 4배 가까이 올랐다. 에너지시장 조사업체 아거스에 따르면 지중해와 흑해를 오가는 아프라막스급 유조선 운임은 이번달 t당 48.18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아거스가 운임 집계를 시작한 2005년 이후 가장 높은 금액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으로 향하는 원유 물동량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원유 수요는 코로나19 봉쇄로 인해 올해 내내 위축돼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월 수입량이 5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코로나19로 인한 수출 침체를 해소하기 위해 석유정제품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하면서다. 정유공장 가동률이 높아지면서 원유 수요가 덩달아 느는 모양새다.
원유운반선 수요는 나날이 커지는 반면 공급은 턱없이 모자란다. 올해 기준 전 세계 탱커 선복량(적재 가능한 화물 중량) 대비 수주 잔량(대기 중인 건조물량)은 4%대에 불과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향후 몇 년 사이에 시장에 풀리게 될 새 탱커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얘기다. 새 유조선을 건조하려는 잠재 고객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내년부터는 노후 유조선의 폐선 및 교체 주문도 대거 밀려들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의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선박의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데다 급속한 환경 기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선령 15년 이상의 탱커는 지난 9월 기준 전체 탱커의 37%에 달한다. 선박 교체 주문 수요가 활짝 열려 있는 상황이다.
이에 국내외 조선·해운 전문가들은 2023년부터 탱커 발주 사이클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VLCC 건조에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한국 조선소들은 이미 LNG 운반선만 해도 2~3년치 일감이 밀려 있다. 배기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주요 선사들의 탱커 리뉴얼 또는 확대 계획이 순차적으로 확인될 경우 조선소의 잔여 슬롯(선박 건조장)을 두고 선사들의 입찰 경쟁이 가속화될 개연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 조선업체 관계자는 “조선 산업이 ‘사이클을 탔다’고 선언하려면 컨테이너선과 LNG 운반선, 유조선 세 가지 선종의 주문이 고루 들어와야 하는데 지금까지 유조선 발주는 뜸했다”며 “최근 영업파트에 유조선 문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업계는 탱커가 LNG 운반선에 이은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할 것이라며 기대감에 찬 분위기다. 저탄소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LNG 운반선 발주가 대거 늘었고 해당 선종에 기술 경쟁력을 지닌 국내 조선소가 이 주문들을 독식하면서 한국 조선업이 불황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다가오는 탱커 시장의 호황은 국내 조선업에 돛을 달아줄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해운전문매체 헬레닉시핑뉴스는 “2022년이 ‘LNG 운반선의 해’였다면 2023년은 ‘탱커의 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다만 한국 조선업을 맹추격하고 있는 중국 조선소들과의 수주 경쟁은 넘어야 할 파도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지난 10일 발표한 ‘한·중·일 3국의 선종·선형별 신조선시장 점유율 변화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VLCC·수에즈막스급 등 대형 유조선 분야에서는 한국 조선소들이 확고한 우위를 갖고 있지만, 경제성이 좋아 선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아프라막스급 유조선은 국내 중형 조선사들의 구조조정 영향으로 최근 5년 사이 중국과 점유율이 역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모처럼 탱커 시장이 커지고 있지만 중국의 추격을 따돌려야 수혜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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