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오만한 인간중심주의 벗어나 물질과 생명에 대해 성찰… 모든 존재에게 바치고 싶다”
팬데믹 고통 이어졌던
지난해 연말 시집 출간
영랑문학상 이어 경사
칠흑같은 어둠의 시대
반딧불이처럼 깜빡이는 빛
여러 사유 결합되며 탄생
환경미화원·노숙인·알바생
‘유령’ 같은 군상들 조명
기후 위기 등 문제도 터치
“시를 쓰며 내향적 자아가
세상 향해 나아가게한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이 한창이던 어느 날, 시인 나희덕의 눈길이 7, 8년 전쯤 줄이 없는 몰스킨 노트에 써놓은 단어에 꽂혔다. ‘가능주의자.’ 그는 시인으로서 무슨 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하지도, 그렇게 명명되지도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살아왔다. 왜냐하면, 무슨 ○○주의자라는 말은 앞에 있는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여타의 것을 배타적으로 내쫓아버리는,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주의자라니. 흠. 생각을 되짚어보니, 만약 어쩔 수 없이 주의자가 돼야 한다면 그나마 가능주의자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라며 써놓은 것 같았다.
시집에는 존재하지만 잊힌, 그래서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을 조명한다. 환경미화원, 노숙인, 생동성 알바, 비전향 장기수, 세월호 및 용산 참사 희생자….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드라이하게, 하지만 서늘하게.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 빗자루만 본다/ 대걸레만 본다/ 양동이만 본다// 점점 투명해져간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빗자루에 매달린 유령들처럼/ 구획된 선과 면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는 우리를// 날이 밝기 전부터/ 어둠 속에서 일하는 우리는/ 머리카락도 잡아낼 만큼 어둠에 익숙해진 우리는/ 손과 발 대신 수십 개의 더듬이를 지녔다/ 소리 없이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 … 온갖 얼굴을 지우는 얼룩들처럼/ 유령들처럼”(‘유령들처럼’ 부문)
―우리 안의 부조리하고 안타까운 모습을 예리하고 서글프게 담았는데요.
“지난해 7월 서울대에서 환경미화원 한 분이 극단적 선택을 했지요. 대학에 몸을 담고 있고, 청소하시는 분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기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그분들이 걸레질하는 옆을 걸어갈 때 마음이 더 복잡해지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환경미화원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세상의 온갖 얼룩을 지우면서도 얼룩처럼 취급당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 많지요. 그분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지요.”
시인은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인류세 등 지구와 인류 전체 문제로도 시야를 확대한다. 특히 장미나 젖소 등 일상 속 생물에 담긴 지구적 위기의 흔적을 묘파한다. “방금 배달된 장미 한 다발//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설마 이 꽃들이 케냐에서부터 온 것은 아니겠지// 장미 한 다발은/ 기나긴 탄소 발자국을 남겼다, 주로 고속도로에// 장미를 자르고 다듬던 손목들을 떠나/ 냉동 트럭에 실려 오는 동안/ 피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누르다/ 도매상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전문)
―놀랍게도 장미 한 다발에서 기후위기를 봅니다.
“퇴근길에 즐겨 꽃을 사곤 했는데, 케냐에서 재배한 꽃이 미국까지 간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어요. 유통 기간이 짧은 화훼산업도 다국적 기업들이 관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소비자는 생산과 유통 과정이 제거된 채 배달되어오는 꽃만 만날 뿐 그 과정에 물과 석유가 얼마나 쓰였는지는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어 우리에게 도착한 것인지 그 전체의 과정을 생각하게 되면 소비의 규모나 방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지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통과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물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들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고요. 다음 시집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 바치고 싶어요.”
인터뷰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점심시간을 놓친 나 시인과 기자는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서 반주를 곁들여 점심을 했다. “어릴 적 말이 없는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시(인)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외향적인 면도 많이 생겼고, 호기심도 많아졌어요.” 그는 세상 이야기부터 시작해, 문단과 문학의 세계를 가로지르고, 시인의 삶 이야기까지 자주 왔다갔다. “시를 쓰면서 제가 한 인간으로서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내향적인 자아가 세상을 향해서 자신을 계속 열어갈 수 있는 힘을 문학이 저에게 실어준 것 같습니다.”
술이 몇 순배 들어가자,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해, 시의 기반이자 탯줄이 된 삶에 대해, 그리고 삶에 있을 수밖에 없는 곡절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이야기는 때론 21세기에서 20세기로 거슬러 내려갔고, 서울에서 멀리 광주로 내려가기도 했다. 이야기가 변속을 거듭할 때마다, 기자는 질문의 엑셀레이터를 밟고 있었으니. 그러나저러나, 시인은 그날 이야기했던가 안 했던가, 별이라거나 반딧불이를…. “염포에 저녁이 오고/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고/ 밤하늘에는 은하수도 물소리를 내고/ 바닷가에 서 있던 우리도/ 멀리서 보면 몇 개의 반딧불이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서로를 맴돌며 희미한 빛을 뿌리는”(‘차갑고 둥근 빛’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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