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밥-영셰프 마루의 찾아가는 도시락 콘서트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요리학교 영셰프스쿨 교장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루가 졸업 프로젝트로 찾아가는 케이터링을 하는데 어딘에게 가고 싶다고 하네요, 괜찮으시겠어요?” 어딘은 내 닉네임이다. “아, 그럼요, 얼마든지요.”
그리하여 어딘글방이 열리는 날 마루가 요리를 해서 오기로 했다. 마루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영셰프스쿨을 선택했다. ‘밥’으로 사람을 돌보고 세상 가꾸기를 배우며, 요리를 매개로 스스로의 삶 디자인과 성장을 목표로 하는 요리학교로 열아홉살 마루가 진로를 결정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가 지향하는, 공동체와 공공성에 기반을 둔 ‘요리하며 사는 삶’을 실험해보기에 영셰프스쿨은 아주 맞춤한 학교이기에. 못난이 농산물을 주제로 요리한다니 과일잼 같은 걸 해 오려나, 잠깐 생각했다.
소박한 밥상을 생각했던 우리는 마루가 준비해 온 요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연잎은행밥, 버섯들깨탕, 어향가지, 된장 라타투유, 토마토 & 마 카프레제, 야채구이, 연근물김치, 김치, 사과정과. 정갈한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서 이쁜 나무도시락에 1인분씩 담아냈다. 놀라운 솜씨였다. 이걸 혼자 다 장만했단다. 9인분을, 아침부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마루는 야무지게 음식을 세팅하더니 ‘못난이 농산물 기 살리기 프로젝트’ 걸개를 벽에 걸었다. 영셰프 마루의 찾아가는 도시락 콘서트. 공정한 먹거리, 공생할 수 있는 식탁, 함께 나누는 공공공 도시락 따위 글씨가 이쁜 그림들과 함께 광목천 위에 배열되어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밥상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마루의 발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셰프스쿨에 재학 중인 마루라고 합니다. 영셰프스쿨은 요리로써 나를 살리고, 누군가를 살리고, 자립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입니다. 저희 영셰프에선 지금 못난이 농산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못난이 농산물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흠집이 났거나, 표면이 매끈하지 않거나, 혹이 났거나 그런 것들부터 아주 크거나 아주 작은 농작물 등등을 못난이 농산물이라고 합니다. 과잉생산되거나 급식 중단으로 판로가 막힌 채소도 못난이 농산물로 분류됩니다. 못난이 농산물로 분류되면 폐기되거나 헐값에 처분됩니다.
마루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전세계 농산물의 20~25%가 상품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폐기 처분된다고 한다. 그것들을 재배하느라 들어간 물, 비료, 노동에너지는 차치하고라도 폐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메탄과 이산화질소는 환경오염과 기후위기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식량이 모자라 굶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데 한쪽에서는 멀쩡한 농산물이 단지 보기에 좋지 않다고 버려지는 것을 두고 마루는 아이러니하면서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못난이 농산물을 만나봤는데, 직접 만나보고 든 가장 큰 생각은 ‘이게 왜 못난이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이 의문은 자연에서 자라나고 키워내는 농산물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정해진 규격에 맞게 자라날 수 있을까라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마루는 마치 소개팅한 것처럼 그들과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가지와 당근과 감귤과 사과의 사정도 알게 됐다. 감귤의 검은 점은 장마철에 유행하는 병을 견뎌낸 흔적이라는 것, 당근은 자라면서 돌부리에 걸려 두갈래로 자라는 경우가 많다는 것, 겉면이 군데군데 밝게 탄 가지는 햇볕을 많이 받은 녀석이라는 것, 사과 껍질이 거칠어지며 금색으로 변하는 현상은 사과에 봉지를 씌우지 않고 그대로 길러냈기 때문이라는 것 등등.
아, 배고프시죠? 빨리 마무리하겠습니다. 저의 도시락 프로젝트도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영셰프 마루의 찾아가는 공공공 도시락. 공공공이 뭘까 궁금하시죠? 공정, 공생, 공감을 뜻합니다. 못난이 농산물을 보며 공정을 생각하게 됐고, 자연스레 공생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항상 누군가를 살리는 요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번 프로젝트는 못난이 농산물을 살리고 외면받는 생명들을 생각해보고자 비건 밥상으로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밤과 은행을 얹어 지은 연잎밥은 찰지고 부드러웠다. 위를 편안하게 다독이는 느낌이었다. 버섯들깨탕의 고소한 향은 몸속에서 한껏 번져나갔다. 어향가지는 별미였다. 매콤 달콤 새콤 짭조름한 맛이 다 났다. 된장 라타투유는 처음 먹어보는데 아이고야, 왜 진작 된장 소스로 라타투유 할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을 만큼 맛있었다. 연근의 빈틈마다 빨강 노랑 녹색 파프리카를 박아 넣어 만든 연근물김치는 아삭하고 새콤했다. 아아 요놈은 진정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구나. 토마토와 마는 의외로 아주 잘 어울렸다. 파인애플과 키위를 갈아 만든 소스가 일품이어서였을까. 토마토 사이사이에 낀 마를 당연히 치즈인 줄 알고 먹었다가 아하, 무릎을 쳤다. 오늘의 도시락은 비건식이었지. 치즈와의 조합보다 상큼하고 활기찬 맛이었다. 어향가지에도 돼지고기 대신 표고버섯과 콩고기가 들어갔다. 후식으로 먹은 사과정과는 쫀쫀하고 달콤했다. 우리는 연신 음, 으음, 신음을 내며 밥을 먹었다.
100년을 살아야 한다면 그중에 한 2년 이렇게 영셰프 같은 요리학교에 다니면서 제대로 음식하는 걸 배우면 좋겠다고 우리는 밥을 먹는 사이사이 이야기했다. 재료에 대한 이해, 요리 과정, 음식을 둘러싼 세계의 지형 같은 걸 배우고 사는 인생은 어쩐지 풍요로울 것 같다고. 그런 다음은 목공 같은 걸 또 한 2년 배우고, 그런 다음 옷 만드는 걸 한 2년 배우고 그러다 보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네. 식탁 주변으로 웃음과 공감과 긍정의 바이러스가 몽실몽실 떠다녔다. 의식주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돼 인생의 출발점에 선다면 용기가 생길 거 같아. 내년에 영셰프에 지원할 거예요, 진짜로. 냠냠 쩝쩝 맛난 음식은 생을 설계하도록 만든다.
마루는 전통요리과에 지원해 합격했고 내년엔 대학을 다닐 예정이다. 사찰음식과 한식 수업을 받으면서 기다림이 중요한 요리 방식이 좋아 더 배워보고 싶어 진학하기로 했단다.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쏟는 음식은 만들 때도 먹을 때도 속이 편안하다고 말하는 마루, 생의 본령을 이미 알아버린 이 청년의 미래가 흠, 궁금하다. 졸업하는 마루에게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를 선물해야겠다. 음식과 관련하여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이다. ‘올해의 밥’을 먹은 작은 선물이다.
※추신: ‘예스어스’나 ‘어글리어스’ 등에서 못난이 농작물을 구매할 수 있다고 마루가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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