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시대상·휴머니즘 담은 원로들의 ‘기억의 장면들’
1970년대~최신작 회화·조각 등 40여점 선보여
예술관·매체는 달라도 작품마다 작가들의 ‘농익은 예술향기’

신학철(79), 서용선(71), 오원배(69), 정현(66). 전쟁과 혁명, 산업화와 도시화, 독재와 민주화 운동 등 저마다 격랑의 현대사를 겪었다. 미술가로서는 탄탄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한국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원로·중진 작가들이다. 세상과 시대·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예술관, 표현 매체와 방식은 달라도 활발한 작품활동은 여전하다. 설치미술가 김기라(48)는 “한마디로 예술가로서 ‘잘 사신’ 분들”이라고 말한다.
이들 작가가 처음으로 한 전시장에 모였다. 두남재아트센터(서울 언주로)에 마련된 기획전 ‘기억의 장면들’을 통해서다. “이렇게들 작품으로 만나니 좋네”(신학철 작가)라는 4인전에서는 1970년대부터 최신작까지 회화와 조각 40여점이 선보이고 있다. 작가마다 예술적 색깔이 분명한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자신과 주변 사람,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은 공통적이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든, 인권이든, 인간 실존과 소외 탐구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따듯한 휴머니즘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민중미술, 한국적 리얼리즘 거장인 신학철의 작품은 1970년대부터 근작, 30여년째 이어지는 연작이 나왔다. 특히 1973년작인 ‘비상탈출’은 첫 공개다. 쫓기는 이의 다급함·불안과 두려움, 쫓는 자와 쫓기는 이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녹색 화면이 역설적으로 긴장감을 높인다. 1970~1980년대 인권이 무시되던 군부독재 시대상이 이 한 장면으로 잘 읽힌다. 신 작가는 “지금의 관람객에겐 어떻게 해석될지 궁금하네”라며 허허 웃는다. 전시장에선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근현대사 속에 가려진 부조리한 권력과 자본, 인간 소외 등을 담은 대작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일부, 1990년대 포토 콜라주, 근작 회화 등도 만날 수 있다.

서용선은 작품세계를 인정받는 왕성한 활동으로 유명하다. 2008년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서 강렬한 색채, 독특한 선, 인문학적 토대에 기반한 관점이 두드러지는 작업을 한다. 단종의 비극이 서린 영월 청령포에서의 ‘특별한 경험’ 이후 단종 폐위, 동학농민운동, 한국전쟁 등 역사 현장을 담은 역사(풍경)화 연작, 화려한 도시 속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실존 문제를 녹여내는 도시 인간 연작 등이 대표적이다. 작품 ‘부역’(2004), ‘젊은 죽음들’(1997) 등은 전쟁과 이념대립 속 인간의 존엄성을, ‘사람들’(1986) 등은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다뤘다. 작가가 “역사화 연작의 계기가 되는 작품”이라는 ‘청령포, 절망’(1995~1996)을 비롯해 고구려 유적 ‘홀승골성’(2017) 등도 출품됐다.

인간의 소외와 실존 문제를 천착해온 오원배는 신작들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작품 ‘무제’(270×415㎝)는 쭈그려 앉아 마스크를 쓰고 절규하는 인물, 텅 빈 새장, 견고한 벽돌벽으로 코로나19 사태라는 전염병 위기 속에 놓인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오 작가는 “코로나19 팬데믹,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은 절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한다”며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 속 인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진다”고 밝혔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역동적 신체를 표현한 드로잉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조각가 정현은 가치 없다며 내버려진 것들, 무관심 속에 방치된 것들을 재료로 삼았다. 철도물류의 주 소재였지만 용도 폐기된 철로의 침목, 산업문명의 핵심인 원유의 정제 과정에서 찌꺼기가 된 콜타르 등이다. 그는 재료들 속에 담긴 시간과 상흔, 이야기들을 예술적 감각으로 재탄생시켜 삶과 존재가치, 고뇌하는 실존적 인간, 인간에 내재된 생명력 등을 사유하게 한다. 작가의 표현으로 “자기결을 찾아주는 일”이다. 콜타르 드로잉, 석고·브론즈 조각품들도 선보인다. 정 작가는 “각자 자신의 미학을 실천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같고도 또 다른 점들을 읽어낼 수 있는 전시회”라고 말했다.
어렵게 한자리에 모인 작가들이라 후학들에의 조언을 청했다. 명료하고 단호했다. “작가는 입말이 아니라 작품으로 말하지.” 전시는 12월20일까지.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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