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화물연대에 업무개시명령은 강제노동 금지한 ILO 협약 위반?

구정모 2022. 11. 2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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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105호 협약 "파업참가에 대한 제재로서 강제노동 금지"…국내선 비준 안돼
국내 비준된 29호 협약은 "전쟁이나 화재·홍수·지진 등 재난·재해 때 강제노동 가능"
재계 "화물연대, 법상 노조 아냐…화물자동차법상 업무개시명령은 정당"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정부가 29일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업무개시명령의 발동을 검토하는 가운데 정부의 이런 조치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서 금지한 '강제노동'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4일 밤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화물연대가 "무책임한 운송 거부를 지속한다면 정부는 업무개시명령을 포함해 여러 대책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실은 27일엔 실제로 "다양한 검토가 실무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29일 국무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심의해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봉주 화물연대본부 위원장은 이에 대해 지난 24일 "업무개시명령은 ILO 협약 105호 '강제근로 폐지'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위원장의 언급처럼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ILO가 규정한 강제노동 폐지 조항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을까.

대통령실 "업무개시명령 다양한 실무 검토"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이재명 대통령실 부대변인이 25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화물연대 집단 운송거부'와 관련한 대통령실 입장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2022.11.25 seephoto@yna.co.kr

업무개시명령, 2003년 물류대란 여파로 화물차에도 도입

업무개시명령은 특정한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법률로 업무를 개시하도록 강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1994년 1월 '의료법'과 '약사법'의 개정으로 이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업무개시명령은 2000년 의료계가 의약분업에 반발해 무기한 집단휴진에 들어갔을 당시 발동된 바 있다. 최근엔 2020년 의료계가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등 정부의 의료정책을 반대하며 집단휴진을 벌였을 때도 이 명령이 내려졌다.

화물 운송을 규율하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이하 화물자동차법)에 이 조항이 신설된 것은 2004년 1월 개정 때이다.

전년도인 2003년 화물연대 파업으로 '물류 대란'이 발생하자 정부가 의료법과 약사법을 참고해 화물자동차법에 이 조항을 넣기로 한 것이다.

[그래픽] 업무개시명령 개요 및 절차 (서울=연합뉴스) 김민지 기자 = minfo@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하지만 당시에도 이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의사와 약사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직업으로 높은 수준의 공적 의무가 부여됐다고 볼 수 있지만, 화물운송업에 이런 정도의 공공성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당시 개정안에 대해 "화물운송사업은 직접적으로 국민의 생명이나 신체의 안전과 관련되지 않는다"며 "화물차운수사업자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통한 규제를 해야 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익상의 이유는 없다고 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개정안을 검토한 국회 건설교통위원회도 "화물운송사업은 (중략) 기본적으로 영리성을 추구하는 업종이고, (중략) 각종 제도도 업계의 자율에 맞춰져 있는 상황에서 공공성을 강조해 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정부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될 뿐만 아니라 (중략)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제도"라며 "법안 심의과정에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의약분업철폐 전국의사 궐기대회 대한의사협회 소속 전국의사 1만여명이 27일 오후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열린 '의약분업 철폐를 위한 전국의사 궐기대회'에서 의약분업 철폐를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전수영/사회/2002.10.27(과천=연합뉴스) swimer@yna.co.kr <저작권자 ⓒ 2002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업무개시명령, 강제노동 관련 ILO 협약 위반 소지 있어

문제의 ILO 협약 105호는 ILO의 190개 협약 가운데 '핵심 협약'으로 분류된 8개 중 하나다.

핵심 협약은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고용상 차별 금지' 등 4개 분야에 2개씩 있다.

이 중 105호는 '강제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으로, 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과 함께 강제노동 금지 분야 핵심 협약을 구성하고 있다.

105호 협약은 ILO가 금지하는 강제노동의 형태를 열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거나 기존의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피력하는 것에 대한 제재 ▲ 경제 발전을 위해 노동을 동원하고 이용하는 수단 ▲ 노동 규율의 수단 ▲ 파업 참가에 대한 제재 ▲ 인종·사회·민족·종교적 차별대우의 수단 등으로 강제노동을 하게 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은 이 가운데 노동 규율의 수단과 파업 참가에 대한 제재 항목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행법상 화물차 운전자는 사용자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닌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로, 근로자성을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까닭에 화물연대의 파업은 엄밀한 의미의 '파업'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운송 거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05호 협약은 아직 국내에서 비준되지 않은 조항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견해 표명에 대한 제재로 강제노동 부과를 금지한 내용이 국가보안법 등과 상충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아직 비준하지 않고 있다. 이 조항을 따를 국내법상 의무는 없는 셈이다.

단, ILO는 이런 핵심 협약에 대해서는 모든 회원국이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그 원칙을 존중하고 실현할 의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ILO 핵심 협약 8개 조항 중 105호를 제외한 나머지 7개 조항을 비준한 상태다.

105호 미(未)비준 국가로는 미얀마, 통가 등이 있는데, 주요 국가로는 한국이 유일하다.

2012년에는 이윤석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이 업무개시명령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화물자동차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업무개시명령 제도가 105호 협약을 위반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회 속기록을 보면 당시 정부는 이 제도의 폐지에 반대했고 의원들도 존치를 원하면서 업무개시명령 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정부가 업무개시명령을 내린 후 국회에 이를 보고하도록 하는 조항(현행 제14조 3항)을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은 ILO의 또 다른 핵심 협약인 제29호도 위반할 소지가 있다.

29호는 강제노동을 정의한 조항이다. ILO는 처벌의 위협 하에 강요된 노동 또는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제공한 것이 아닌 노동을 강제노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강제노동에 포함되지 않는 5가지 예외 조항을 들고 있는데, 업무개시명령과 관련해선 '비상 상황'(in cases of emergency)에 해당하는지가 관건이다.

29호는 비상 상황의 사례로 ▲ 전쟁이 발발했을 때 ▲ 화재와 홍수, 기근, 지진, 극심한 전염병이나 가축 유행병 등과 같은 재난·재해가 발생했을 때 ▲ 기타 일반적으로 인구 전체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로 들고 있다.

헌법을 전공한 허창환 변호사는 '헌법상 근로의 의무에 관한 연구-업무개시명령 제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강제노동 금지의 원칙의 예외로 인정되는 전쟁이나 화재, 홍수 등의 재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업무개시명령 제도는 ILO 협약상 강제노동 금지의 원칙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ITF)도 "인구 전체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준에서만 비상 지휘권(emergency powers)에 의한 노동자의 동원이 허용된다는 점을 ILO 전문가위원회가 여러 차례 확인한 바가 있다"며 한국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29호를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ITF는 세계 150개국의 700여개 노조를 회원사로 둔 국제산별 조직이다. 화물연대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가입돼 있다.

화물연대 파업 운행 멈춘 화물차 (광주=연합뉴스) 조남수 기자 = 화물연대 파업 닷새째인 28일 광주 광산구 진곡화물차고지에 운행을 멈춘 화물차들이 주차돼 있다. 2022.11.28 iso64@yna.co.kr

ILO '협약 위반' 판정땐 권고 가능…강제성 없지만 '노동인권 후진국' 인식될 수도

ITF와 공공운수노조는 우리 정부가 ILO 핵심 협약 29호, 105호와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를 위반했다며 질베르 웅보 ILO 사무총장에게 긴급개입을 요청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ILO는 노동자단체가 이런 진정을 내면 별도 노사정위원회를 꾸려 해당 정부에 관련 정보를 요청하고 이를 조사해 권고사항을 제시한다. 해당 정부가 ILO의 권고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ILO 이사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사안을 심층적으로 조사하고, 최악의 경우 총회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ILO의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여서 이행의 강제성은 없지만 ILO는 최근 들어 노사정위원회의 권고사항이 담긴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어 해당국은 국제사회에서 '노동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살 수도 있다.

반면 재계는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노조원이 아니기 때문에 화물자동차법을 적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화주업체 측 재계 관계자는 "집단적인 운송거부 행위를 파업이라고 하려면 화물연대가 법상 노조로 인정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이에 따라 "화물연대는 화물자동차법에 규율을 받고 있는데, 정부가 이 법에 따라 발동하는 업무개시명령은 정당하다"고 반박했다.

정부도 업무개시명령이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화물차 운전자들은 근로자가 아니어서 화물운송업체의 지시에 응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운송을 거부하더라도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를 감안할 때, 이들의 집단적 운송 거부에 대해 업무개시명령 이외에 적절한 대응수단이 없다며 그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또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는 등 법률상 요건과 절차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고, 개별적으로 운행을 중단하는 행위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므로 헌법상 기본권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pseudoj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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