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식인의 사랑, 식인의 윤리…'본즈 앤 올'

손정빈 기자 2022. 11. 29.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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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영화 '본즈 앤 올' 카니발리즘의 의미는?
기괴한 이야기로 보이는 보편적 이야기
직설적이며 전격적인 메타포 잔상 남겨
크로스오버 장르영화로도 높은 완성도
동명 장편소설 스크린 위 시(詩)로 전환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어떤 관객은 애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다른 관객은 역겹다며 중도에 포기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지 모른다. 카니발리즘(cannibalism·동족포식을 뜻하며, 인간에 적용하면 식인을 의미)은 분명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새 영화 '본즈 앤 올'(Bones and All)을 관객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진입 장벽이다. 하지만 일단 러닝 타임 130분을 견뎌낼 수 있다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카니발리즘은 극단적 은유일 뿐 '본즈 앤 올'은 상식을 벗어난 기이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보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익숙한 이야기가 우리 모두 한 번 쯤 겪었던 일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밤 친구의 손가락을 먹어 치울 듯이 깨물어 상처를 입히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도주했으며, 이후 아버지마저 떠나버리게 돼 홀로 남겨졌고, 아버지의 오디오 편지를 통해 자신의 식인 습성을 알게 된 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여정을 떠난 매런(테일러 러셀)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이름을 붙여볼 수 있다. '본즈 앤 올'은 호러 영화이고, 첫사랑 영화이며, 성장 영화이고, 로드 무비이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네 가지 표현, 네 가지 장르를 서로 꼬리를 물려 교직한다. 사실 첫사랑과 성장은 같은 얘기나 다름 없다. 성장은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스스로 이뤄내는 것이기에 이 이야기가 로드 무비가 되는 건 필연적이다. 게다가 혼자서 한 발 씩 내딛으며 떠나야 하는 그 길은 늘 공포스러운 게 당연하다.

이때 매런의 식인 습성은 '본즈 앤 올'의 종착지인 성장을 향해 가는 직설적이며 전격적인 메타포다. 다시 말해 '먹어 치워야 큰다'라는 뜻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 은유는 직설적이다. 단독자로서 세계에 나를 내던졌을 때 따라오는 타자화의 충격을 카니발리즘이라는 더 강렬할 수 없는 설정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전격적이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매런이 세 번 식인하면서 마침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는 이야기다. 인간은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고, 먹지 않고 클 수 없으니까. '본즈 앤 올'을 또 다른 식으로 말하면, 남들과 달라도 너무 다른 매런이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차례로 만나며 자기 존재를 스스로 인정해가는 이야기다. 인간의 삶이라는 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매번 고민하는 과정이니까.


물론 '본즈 앤 올'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카니발리즘의 의미와 무관하게 크로스오버 장르영화로서 매력적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호러·로맨스·성장·로드무비라는 각기 다른 카테고리를 한 그릇에 담아낸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2시간1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네 가지 장르의 매력을 모두 살려내는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그래서 '본즈 앤 올'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음산한 공포로 경험할 수 있고, 절절한 첫사랑의 감각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어른이 되기 위해 견뎌야 할 시리고 냉혹한 시간으로 가슴에 담아둘지도 모르고, 황량한 벌판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방황의 이미지를 가슴 속에 남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를 꾸준히 봐온 관객이라면 이번 작품이 전작들을 아우르는 영화라는 걸 눈치챌 것이다.

'본즈 앤 올'은 적확한 이미지로 이 작품의 네 가지 키워드를 펼쳐 보임으로써 비로서 영화다운 영화가 된다. 매런이 만나게 되는 ('리'를 제외한) 세 명의 '이터(eater)'는 모두 등장만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기괴한 분장 같은 것 하나 없이도 이터들의 말투나 표정 혹은 웃음소리만로도 보는 이를 한껏 몰아붙인다. 매런의 첫사랑인 '리'를 배우 티모시 살라메에게 맡긴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깡마른 몸매에 셔츠를 풀어헤치고 아무렇게나 염색된 머리를 휘날리며 운전대를 잡은 '리'를 보고 있으면, 최근 영화계에서 살라메보다 첫사랑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된다. 또 매런을 연기한 배우 테일러 러셀의 얼굴을 반복해서 클로즈업 해가며 그의 내적 성장을 보여주고, 미국 중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오래 비춰 매런의 여정을 시각화하는 방식 역시 군더더기 없다.


'본즈 앤 올'의 카니발리즘이 상영 시간이 지속될수록 역겹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는 건 관객이 선정적 묘사에 익숙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타자성에 관한 윤리적 고민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런은 (리를 포함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네 명의 이터를 만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뇌한다. 영화는 매런이 다른 이터가 가진 삶의 방식을 추종하게 놔두지 않고, 대신 매런이 그 이터들을 때로 반면교사하고 때로 타산지석하면서 누구도 가지 않았을 법한 길로 내몬다. 그는 그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이터를 비난하고, 어떤 이터와는 절연하며, 어떤 이터는 살해하고, 어떤 이터는 뼈까지 남김없이 먹어버린다. 그렇게 매런은 그가 만난 모든 동족과 차례로 결별한 뒤에야 진짜 자기만의 윤리로 무장한 새 삶을 시작한다.


이처럼 '본즈 앤 올'에 관해서는 어떻게든 이야기해볼 수 있겠으나 이 영화는 결국 보고 느끼면 그만인 직관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두 명의 떠돌이 아웃사이더, 이들의 연대와 사랑, 숨겨둔 과거와 슬픔, 드넓은 벌판, 그 황량한 땅 위를 달리는 낡은 트럭, 젊은 떠돌이들을 위협하는 늙은 루저들, 피, 피 묻은 입,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지는 해를 바라보며 꼭 껴안은 두 남녀, 맞잡은 두 손, 이별. '본즈 앤 올'은 이런 단어들로 파편화 돼 기억되더라도 영화가 결코 훼손되는 것 같지 않다. 이 작품은 카밀 데안젤리스가 2015년에 내놓은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소설을 흡사 영상 시(詩)로 전환한다. 그 시는 무척이나 잔혹한데, 잔혹한 만큼 아름답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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