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령총 기마인물상은 요절한 어린 왕자?[이기환의 Hi-story](60)

입력 2022. 11. 2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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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딸랑 금령총 이야기’…. 2023년 3월 5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이 열고 있는 특별전 이름은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입니다.

이 ‘어린 영혼의 길동무’라는 수식어와 함께 경주박물관 어린이박물관의 연계프로그램(‘딸랑딸랑 금령총 이야기’)에 시선이 꽂히더라고요. 뭔가 연상이 되죠. ‘딸랑딸랑 금방울(금령), 어린 길동무’ 등의 단어는 모두 어린이와 관련이 깊죠.

1500년 전 신라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에서 출토된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 도기)’. 그중 주인상의 얼굴(왼쪽)은 오뚝한 콧날에 뾰족한 턱이 인상적이며, 살짝 감은 듯한 두 눈 등이 사실적인 조각상이다. 이 인물상의 모델이 바로 무덤의 주인공인 어린 왕자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하인상의 인물(오른쪽)은 주인을 저승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손에 제사의식에 쓰이는 방울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장례의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이라는 설도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렇습니다. 이 금령총의 주인공은 약 1500년 전인 5세기 말~6세기 초에 살았던 왕자인데요. 안타깝게도 5~6세 무렵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고요. 이 요절한 왕자 이야기를, 그 왕자를 가슴속에 묻어야 했던 신라 마립간(왕)의 심정으로 풀어봅니다.

혈안이 된 일제의 ‘보물찾기’ 지금으로부터 99년 전쯤인 1924년 5월 10일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경북 경주 노동리에 있던 반쯤 무너진 고분 2기(126·127호분)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고분은 경주에서 가장 큰 단독분인 봉황대(125호분·지름 82m, 높이 22m)에 딸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습니다.

이 두 폐고분에 눈독을 들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3년 전인 1921년 주막집 확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 있죠. 바로 금관을 비롯한 온갖 금제유물이 터져나온 금관총입니다. 금관총 발굴은 경주 현지의 아마추어들이 서둘러 유구와 유물을 파헤치는 바람에 학술적인 정보를 거의 잃은 채 졸속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일본 학자들은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齋藤實·1858~1936)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 두 폐고분 조사에 나섰답니다. 학술조사 명목이었지만 금관총에서처럼 온갖 황금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일종의 ‘보물찾기’ 차원이었습니다.

그 예상이 맞았습니다. 126호분에서는 금동신발 등 각종 금은 제품이 출토됐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에는 ‘식리총(飾履塚·장식 신발 무덤)’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127호분에서는 더욱 놀라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3년 전 금관총에서 첫 발굴된 금관을 비롯해 귀고리, 허리띠, 목걸이, 팔찌 등 순금제 장신구가 보였습니다.

또 금관총에서는 없는 유물인 금방울(금령)이 출토됐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을 ‘금령총’이라 했습니다. 이어 ‘작은 고리를 장식한 굵은 칼’도 노출됐고요. 무엇보다 무덤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발굴자의 호미 끝에 걸린 유물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옆으로 넘어진 채 발견된 기마인물형토기 2점(국보)이었습니다.

금령총 허리띠의 과판(꾸밈 쇠붙이)은 23점에, 길이는 74㎝ 정도이다. 동시대에 제작된 천마총 금허리띠(과판 44점, 길이 125㎝)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다. /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앙증맞은 금관, 금허리띠의 크기 어떻게 이 고분의 주인공을 5~6세 어린이, 그것도 왕자로 판단할까요.

먼저 왕자로 추정하는 근거를 알아볼까요. 신라 고분 주인공의 성별은 주로 ‘귀고리와 큰 칼(대도)’의 착장 여부로 판단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는 고리-큰 칼=남성’으로, ‘굵은 고리 귀고리=여성’으로 추정하거든요. 금령총 주인공의 머리에는 가는 고리 귀고리가, 허리춤에는 장식이 달린 둥근 고리 큰 칼이 보였답니다. 그래서 남성으로 추정한 겁니다.

주인공의 나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선 목관(길이 150㎝·너비 60㎝)이 작았고요. 또 주인공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노출된 각종 장신구로 몸집을 추정할 수 있죠. 그렇게 보니 금관과 금허리띠의 간격은 약 30㎝에 불과했습니다. 금허리띠와 발찌(구슬)의 간격 역시 30㎝였고요. ‘머리(금관의 장식 끝부분)-허리-발(발찌 추정 구슬)’을 잇는 장신구의 간격은 아무리 길게 보아도 90㎝ 정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후하게 봐도 주인공의 키는 90~100㎝ 정도라는 얘기죠.

금관의 크기를 볼까요. 주인공이 착장한 상태의 금관 지름(15㎝)이 다른 고분의 출토품(천마총 20㎝·금관총 19㎝·서봉총 18.4㎝)보다 작고요. 특히 금령총 금관(관테 53㎝·높이 27㎝)은 거의 동시대에 조성된 천마총의 금관(관테 64㎝·높이 32.5㎝)보다 훨씬 작습니다. 한마디로 머리통이 작다는 얘기죠.

금령총의 금허리띠를 봐도 그렇습니다. 허리띠의 과판(?板·꾸밈 쇠붙이)이 23점에 길이는 74㎝ 정도인데요. 천마총 금허리띠(과판 44점·길이 125㎝)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죠. 천마총은 왕 혹은 왕족인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거든요.

그렇다면 비슷한 시대에 조성된 금령총이 어린 나이에 죽은 왕자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키(90㎝ 정도)를 한번 살펴볼까요. 2001년 경기도 양주에서 17세기 중엽 미라 한 구가 발굴됐는데요. 미라 신장은 99.4㎝, 치아로 측정된 연령대는 5.5세 전후로 밝혀졌습니다. 어린이가 자라는 환경이 시대에 따라 다를지라도 신라 금령총 주인공의 신장이 90~100㎝ 정도라면 어떨까요. 역시 5~6세 무렵의 왕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어린 왕자의 오른쪽 허리춤에 찬 ‘큰 칼(대도)’을 허투루 넘겼는데요. 국립경주박물관 김대환 학예연구사가 귀띔해주더라고요. “이 어린 왕자가 왼손잡이였을 것”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왼손으로 오른쪽 허리춤의 칼을 뽑았을 테니까요.

보통 30세 넘긴 신라 임금들의 평균수명 이렇게 금관과 금허리띠 등 각종 순금제 장신구를 착장한 이 어린 왕자는 누구일까요.

이 고분의 뒤에 버티고 있는 가장 큰 단독분인 봉황대(신라왕)에 딸린 무덤(배장묘·陪葬墓)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물론 봉황대의 주인공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서도 보이지 않고요.

금령총 주인공이 썼던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비해 작다. 머리 크기가 작은 어린 왕자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다만 봉황대 및 금령총의 추정연대(5세기 말~6세기 초)로 가늠해볼까요. 일단 자비왕(재위 458~479)과 소지왕(재위 479~500), 지증왕(재위 500~514) 등이 떠오르는군요. 이때는 이미 장자(맏아들) 승계 원칙이 제도화했는지 자비왕은 눌지왕(재위 417~458)의 장자로서, 소지왕은 자비왕의 장자로서 왕위를 나란히 이었고요. 지증왕은 아들이 없던 소지왕의 6촌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른 분이죠.

봉황대의 주인공이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 중 한분이라면 어떨까요. 금령총 주인공은 이 세분 중 한분이 낳은 아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죠. 여기서 신라 상고기(기원전 57~기원후 514) 임금들의 평균수명을 정확히 알 방법은 없어요.

가장 재위기간이 짧은 벌휴왕(재위 184~196)과 기림왕(재위 298~310)조차 13년간 재위했거든요. 또 상고기 22명의 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20년이 되지 않는 왕은 6명에 불과합니다. 그 시대 신라 임금들의 수명을 대체로 30세 이상으로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금령총 주인공처럼 유아 시절에 사망하는 사례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할까요.

2018년부터 국립경주박물관이 금령총을 재발굴했습니다. 그 결과 봉황대와 기존에 이미 조성돼 있던 고분 2기(127-1호·127-2호) 사이에 금령총을 비집고 끼워넣었다고 파악했습니다.

이상하죠. 지름 30m에 이르는 고분(금령총)이 왜 그 비좁은 틈에 굳이 ‘입주’했을까요.

금령총 주인공, 즉 어린 왕자의 예기치 않은 죽음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봉황대의 주인공(자비왕·소지왕·지증왕)이 엄청 사랑했던 왕자(정궁의 소생이든 후궁의 소생이든)가 갑작스럽게 죽자 자식사랑을 듬뿍 담아 최고의 예우를 갖춰 장례를 지내준 것일 수 있답니다. 기존에 조성된 127-1·2호보다 앞서 끼워넣을 만큼…(금령총 재발굴 결과 이 3기의 고분 조성 후에도 3기의 고분, 즉 127-3·4·5호가 추가로 드러났습니다. 또 어떤 왕자 혹은 왕족이 더 묻혔을까. 이 부분의 해석은 훗날로 미뤄야 한다).

기마인물의 비밀 안타깝게 요절한 이 어린 왕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상당수 연구자가 하나의 단서로 꼽는 것이 있는데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조선총독부 소속 일인학자들이 경주 노동리에 있던 반쯤 무너진 고분 2기(126·127호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왼쪽은 금관과 함께 금령(금방울) 등이 출토된 금령총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말 탄 인물상’ 2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그중 1점은 주인상(높이 26.8㎝)이라고 하고요. 다른 1점은 그 주인을 따르는 하인상(높이 23.4cm)이라고 하는데요.

주인은 고깔 형상의 띠와 장식을 두른 삼각모를 쓰고, 다리 위에 갑옷을 늘어뜨렸습니다. 하인은 수건을 동여맨 상투머리에 윗옷을 벗은 맨몸입니다. 등에는 봇짐을 메고 오른손에는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길 안내를 맡은 듯합니다.

주인의 말에는 이마의 귀 사이에 뿔 같은 장식이 튀어나오고 각종 말갖춤새가 표현돼 있습니다. 반면 하인의 말에는 장식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기마인물형 도기와 함께 상당량의 말갖춤새가 보인다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재갈과 안장, 발걸이, 말띠꾸미기, 말다래, 말방울(마령), 발종방울(마탁), 치레걸이(행엽) 등을 갖춘 최소 3세트의 말갖춤새였습니다. 이 가운데 말 탄 이의 체구를 짐작할 수 있는 안장과 발걸이가 소형인 것이 특징인데요.

‘주인공=유아’임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죠. 남은 높이가 56㎝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말 모양 도기도 출토됐는데요. 이 말은 ‘메롱’ 하듯 혀를 쑥 내밀고 있어요. 꼭 어린 왕자와 장난을 치듯이 말입니다.

5~6세 어린 왕자의 무덤에 웬 말 관련 장신구가 이리 많다는 말입니까. 상상해볼까요. 요즘도 남자아이들이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 신라의 어린 왕자도 당대의 자동차인 말을 엄청 좋아했을 수 있죠. 이 꼬마가 생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말 관련 용품들을 넣어주었겠죠. 연구자 중에는 “어린 왕자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 갑작스레 사망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초상화? 그런 측면에서 이 기마인물형 도기의 주인상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꽤 있습니다.

왜냐면 다른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토우의 얼굴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뚝한 콧날에 뾰족한 턱 때문인지 인상은 다소 날카로워 보입니다. 살짝 감은 듯한 두 눈과 펑퍼짐한 말을 보면 금세 친근감이 배어난다고 합니다.

가만 보면 꼭 누군가를 모델로 만든 느낌이 듭니다. 모델 후보는 무덤의 주인공 아닐까요.

‘주인=요절한 어린 왕자’라는 견해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요. 어떤 연구자의 말처럼 이 기마인물상은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아닐는지요. 주인 옆을 지킨 하인상은 어떨까요. 이번에 발간된 특별전 도록은 “오른손에 장례의식에 사용되는 방울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례 행위를 주관하는 제사장일 수 있다”고 풀이했습니다. ‘배 모양 그릇’과 ‘등잔 모양 그릇’ 등도 의미심장한 유물입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온갖 금제 유물들. 굽은옥(곡옥)이 없는 금관이 금제 허리띠와 금방울(금령) 등과 함께 쏟아졌다. 1921년 첫 번째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과 구별하기 위해 금령총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방울(금령)을 특이한 유물로 꼽았기 때문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딸랑딸랑 금방울·흙방울 출토양상과 출토유물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즉 말을 무척 좋아했던 어린 왕자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신라왕)는 최고의 장례의식을 마련해주었다, 당대 최고의 장인에게 명해 왕자와 그를 저승길로 안내할 하인(혹은 제사장)의 얼굴을 조각한 도기를 만들었다, 저승에서 만날 물길을 무사히 건넜으면 하는 마음으로 ‘배 모양 그릇’을, 어두운 공간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말라는 심정으로 ‘등잔 모양 그릇’까지 넣어주었다, 뭐 이렇게요.

유물의 전반적인 사이즈가 앙증맞은 금령총에서는 금방울·흙방울 등 뭔가 아이와 관련된 유물들이 더러 보이는데요.

금령총의 이름이 된 금방울(금령)도 그중 하나입니다. 금방울은 주인공의 허리춤에 매단 것과 금관에 달린 것, 두 종류가 있는데요. 허리춤의 금방울은 표면에 가는 금띠를 마름모 모양으로 붙여 15개의 구획으로 나누었고요. 금관의 금방울은 별도의 구획 없이 금띠를 두 번 돌린 뒤 가운데를 유리로 마감했습니다.

흙방울도 10점 정도 확인됐습니다. 10점 모두 위아래를 관통하는 구멍이 있었고요.

CT(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소리를 내는 용도의 흙 구슬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인상의 오른손에 든 방울 모양과 비슷합니다.

〈삼국지〉 ‘동이전·한조’는 “소도(신성한 공간)에서 하늘제사를 지낼 때 북(鼓)과 방울(鐸)을 사용했다”고 했거든요. 고대의 방울은 정치나 의례의 중요한 도구로 쓰였다는데요. 그냥 어린 왕자가 흔들고 놀았던 금방울·흙방울로 해석하고 싶어요.

어떻든 늦가을~겨울을 거쳐 내년 새봄(3월 5일)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금령총 특별전을 1500년 전 어린 왕자를 둔 부모의 심정으로 한번 관람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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