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놓치고 있는 한전 적자의 진짜 이유

전혜원 기자 2022. 11. 29.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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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이 올해 발행한 한전채는 25조원이 넘는다. 한전이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빌려 적자를 메우면서 한전채가 냉대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탈원전 정책 때문에 적자가 더 심해졌을까?
‘레고랜드 사태’로 논란의 중심에 선 김진태 지사는 “한전이야말로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레고랜드 사태’로 논란의 중심에 선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최근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이런 문자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적자를 메우느라 대규모 채권을 발행해서 시장을 교란시킨 한전(한국전력)이야말로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 한전과 민주당은 이 실정(失政)을 가리려고 레고랜드를 정쟁화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에서 왜 갑자기 한전이 튀어나올까?

지난 9월28일 김진태 지사는 돌연 레고랜드 사업 개발을 맡은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 신청을 법원에 내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강원도는 이 회사의 빚 2050억원에 대한 지급을 보증하고 있었다. 김 지사의 이날 발표는 그 지급보증을 철회하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강원도를 믿고 돈을 빌려준 투자자들은 당황했다. 이들뿐 아니라 다른 지방정부나 기업에 돈을 빌려줬거나 빌려줄 투자자들까지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이관휘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김진태 지사의 행위가 있기 전에도 기업들이 돈을 빌리기 어려웠던 것은 맞다. 사실 한국 채권시장이 굉장히 ‘얕은 시장(thin market)’이다. 가뜩이나 신뢰가 부족해 충분한 양의 채권이 거래되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 김진태 지사가 기름을 부은 거다”라고 말했다.

채권이란 채무, 즉 빚을 언제 얼마에 갚겠다고 적은 문서다. 채권을 발행한다는 건 돈을 빌린다는 뜻이고, 채권을 산다는 건 돈을 빌려준다는 뜻이다. 투자자들은 대체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비교적 적지만 안정적인 이자와 원금을 돌려받으려는 기관이나 개인이다. 이런 채권을 거래하는 시장이 채권시장이다.

이제 김진태 지사가 기름을 부은 채권시장의 상태를 살펴보자. ‘신용 스프레드’라는 지표가 있다. 국채와 회사채 간 금리 차이를 나타낸다. 정부가 빌리는 돈(국채)은 금리가 낮다. 국가는 돈을 떼먹을 염려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채는 이른바 ‘안전자산’이다. 그러나 회사채로 돈을 빌리는 회사는, 기업마다 다르지만, 국가보다는 돈을 상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회사채의 금리가 국채의 금리보다 높은 이유다. 신용시장이 흔들리면, 투자자들은 아무래도 원리금을 상환하지 않을 가능성이 없는 ‘국가’가 발행한 채권을 회사채보다 선호하게 된다. 금융시장이 불확실해질수록 회사채 금리는 국채 금리보다 높아지면서, 신용 스프레드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최근 신용 스프레드는 코로나19 위기 때보다도 높다. 2009년 9월 이후 최대 수준이다. 왜? 한국은행이 지난 10월20일 펴낸 보고서에 단서가 있다(한민·홍준유·지성민, ‘BOK 이슈노트-최근 신용채권시장 상황 평가:신용 스프레드 확대요인을 중심으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은 ‘떼먹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기업에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게 됐다(위험한 채권을 사지 않으려 한다).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신용도와 유동성(현금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은 신용채권의 투자수요가 크게 위축”됐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들어 채권 발행이 크게 늘었다. 발행된 채권의 대부분이 공기업 발행 채권인 ‘특수채’와 시중은행 발행 채권인 ‘은행채’였다. 공기업이나 시중은행이 돈을 못 갚을 일은 거의 없으므로, 이 채권들은 AAA 등급 내외의 높은 신용도를 얻기 마련이었다.

초우량 채권이 많이 나왔으니 좋은 일 아니었나? 문제가 발생했다. 투자자들이 초우량 채권에 몰리면서 신용도가 낮은(그러나 다른 시기였다면 채권으로 그럭저럭 돈을 빌릴 수 있었던) 다른 기업들이 돈을 빌리기 어려워졌다. 보고서는 이렇게 쓴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 이후의 한전채 발행 급증은 신용도 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위한(못한) 신용채권 수요를 구축하는(쫓아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공기업인 한전이 발행하는 한전채는 대표적인 특수채다. 보고서를 작성한 한민 한국은행 금융시장국 채권시장팀 차장은 “은행채 등 다른 채권도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전채가 예년보다 빠른 속도로 많이 발행되면서 채권시장에 부담을 주고 있다. 채권도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 떨어지는데, 채권에서 가격이 떨어진다는 건 금리가 오른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한전채 물량 확대가 (한전채 금리뿐 아니라 전체 회사채의) 금리 상승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때 원전 비중 오히려 늘어

채권은 주식과 달리 매입할(돈을 빌려줄) 때 이미 이후 돌려받을 원리금이 정해져 있다. 예컨대 원리금 100만원이 보장된 채권이라면 경우에 따라 90만원으로 살 수도 있고(90만원을 빌려주고 100만원을 상환받음), 80만원으로 매입할 수도 있다(80만원 빌려주고 100만원 상환). 투자자 입장에선 싸게 살수록 높은 금리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회사 입장에선 회사채를 싸게 팔수록 높은 금리를 내야 한다. 그만큼 이 회사의 신용도가 내려갔다고 볼 수 있다.

한전이 올해 들어 발행한 한전채는 25조원이 넘는다. AAA 등급인 한전채 3년물 금리는 올해 초만 해도 연 2%대였으나 11월16일 현재 5.476%으로 두 배 넘게 뛰었다. 심지어 신용도가 더 낮은 AA- 등급 3년 회사채 금리(5.416%)보다 한전채 금리가 더 높다. 투자자들이 AAA 등급의 한전채를 일반 기업의 AA- 등급 회사채보다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한전이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빌려 적자를 메우면서 한전채가 냉대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연간 적자가 5조8601억원이었는데 올 3분기까지 누적적자가 21조8342억원에 달한다. 적자 요인은 연료비 상승이다. 지난해 1~9월 t당 61만6400원이던 액화천연가스(LNG)가 올해 1~9월에는 t당 132만5600원이 됐다. 같은 기간 t당 123.5달러이던 석탄(유연탄) 가격도 354.9달러로 크게 올랐다. 외부 요인 때문에 적자가 늘어나고, 늘어난 적자 때문에 채권을 계속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이 한전에서 벌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값비싼 LNG 발전 비중이 커져서 한전 적자가 더 심각해졌을까? 통념과 달리, 전체 발전량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문재인 정부 동안 2017년 26.8%에서 2021년 27.4%로 오히려 0.6%포인트 늘었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우 5.6%에서 7.5%로 1.9%포인트 느는 데 그쳤다.

문재인 정부 기간에 LNG 비중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탈원전이나 신재생에너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석탄 발전이 줄어든 점과 더 큰 관련이 있다. 2019년 12월부터 석탄발전소에 대해 정해진 용량의 80%까지만 발전하거나 가동을 정지하도록 하는 ‘미세먼지 계절관리제’를 시행했다. 그 결과 석탄 발전 비중은 2017년 43.1%에서 2021년 34.3%로 8.8%포인트 줄었고, 같은 기간 LNG 비중은 22.8%에서 29.2%로 6.4%포인트 늘어났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3년 1분기부터 2022년 2분기까지 분기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원전 이용률이나 원전 비중은 한전 영업이익과 상관이 없었다. 오직 판매단가와 유가만이 한전의 영업이익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예컨대 전력 판매단가가 높아지면 한전 영업이익이 늘어났다. 반면 유가가 오르면 한전의 영업이익은 떨어졌다. 결국 수입 가격이 유가에 연동되는 두 화석연료(LNG·석탄)의 발전 비중이 여전히 60% 수준으로 높은 현실이, 연료비 변동에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한전은 발전을 담당하는 자회사들과 일부 민간 발전사들로부터 전력을 도매가로 사와서 판매한다. 연료비 상승에 따라 도매가가 지난해 1~9월 ㎾h(킬로와트시)당 83.3원에서 올해 177.4원으로 두 배 이상이 되었다. 전기요금은 같은 기간 ㎾h당 107.6원에서 116.4원으로 8.2% 올리는 데 그쳤다. 한전은 1㎾h의 전기를 177.4원에 사와서 116.4원에 팔고 있다. 전기를 팔수록 손해를 본다.

그런데 한국은 전기요금이 산업용·가정용 공히 세계에서 가장 싼 편에 속한다. OECD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0년 기준 ㎿h(메가와트시)당 94.3달러로 OECD 평균 107.3달러의 87.9% 정도다. 비교 가능한 OECD 회원국 33개국 중에서도 22위다. 한국 주택용 전기요금은 ㎿h당 103.9달러로, OECD 평균 170.1달러의 61.1% 수준이며 34개국 중 31위다.

한전의 부채는 올해 3분기 말 177조7841억원이다. 정부·여당은 한전채 발행 한도를 늘리려 한다. ⓒ연합뉴스

‘양질의 값싼 전기’ 지속 가능한가

한전의 부채(자회사 연결 기준)는 올해 3분기 말 177조7841억원이다. 올해 국가예산 약 608조원의 3분의 1에 가까운 규모다. 통상 부채비율이 200%를 넘으면 위험하다고 보는데, 한전은 이미 353%다. 정부·여당은 한전채 발행 한도를 10배로 늘리려 한다. “투자자들은 한전의 재무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해법을 내야 한다. 물론 전기요금 인상은 정치적으로 어렵다. 물가도 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전기료 인상 같은 불편한 일을 회피하려 국채를 발행한다면, 이번에는 (한국 정부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면서) 국채 금리가 올라갈 거다. 경제에서 ‘공짜’는 없다. 누군가는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차관의 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자 유럽은 전기요금을 올렸고 대대적으로 전력을 절약하고 있다. 프랑스 에펠탑이 새벽 1시까지 밝히던 조명을 밤 11시45분까지만 켤 정도다. “에너지 가격이 몇 배로 오른 상황에서, 한국은 여력이 있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낮은 요금을 적용하고 있다. 달라진 현실을 직시해 반영하지 않으니 한전과 채권시장만 아우성이다. 채권시장이 교란되면 다른 기업들까지 자금조달 비용이 올라가고, 가장 절박한 곳부터 피해를 본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었던 ‘양질의 값싼 전기’가 지속 가능한지 돌아봐야 한다(김용범 전 차관).”

유가가 크게 오른 지난해 한국의 1인당 전력 사용량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산업용 전기가 포함된 수치다. 주택용 전기 사용량은 전체 사용량의 15%에 불과하며 산업용이 55%를 차지한다. 그러나 1994년 주택용 전기요금 대비 산업용 전기요금의 비중이 53.7%였던 데 비해 지금은 90%를 넘어섰다. 산업용 전기요금만 올려서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얘기다. 한전은 올해 적자를 해소하려면 4분기 전기요금을 ㎾h당 261원 인상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4인 가구로 단순히 나누면 월 8만원 조금 넘는 돈이다.

자원의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할지 결정해야 하는 고전적인 정치의 문제 앞에서,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부의 탈원전을 소환할 뿐이다. 겨울이 오고 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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