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16강보다 훨씬 어려운 법사위 통과

곽수근 산업부 차장 2022. 11.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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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시대에
특허소송 포기하는 중소·벤처
소송편익·선택권 넓히는 법안
직능이기주의가 발목 잡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이 법안을 통과시키며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온 국민이 ‘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기대하는 요즘, 과학기술계가 ‘16년 만의 통과를 염원’하는 법안이 있다. 특허침해 소송에서 당사자가 원하면 변리사를 추가 선임할 수 있게 하는 변리사법 개정안이다. 기존처럼 변호사는 대리인으로 필수 선임하고, 필요한 경우 변리사를 추가 대리인으로 둘 수 있게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취지다. 특허 분쟁에 휘말린 기업 입장에서는 특허 기술에 전문성 있는 변리사를 추가 선임하면 유리해 법안 통과를 촉구해 왔지만, 변호사 등 법조계 반발로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제17~20대 국회에서 2006·2008·2013·2016년에 각각 발의됐지만 한 번도 본회의까지 가지 못하고 상임위나 법사위에서 폐기됐다. 이번 개정안이 지난 5월 상임위(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하자 과학기술계가 고무된 이유다. 앞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공학한림원 등 4개 단체가 “우리 기업들이 산업재산권 침해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라며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냈고, 벤처기업협회와 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 등 10개 단체는 “변호사 단독으로는 복잡한 기술에 대한 특허분쟁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어렵다”며 변리사 대리를 허용해 달라는 입장문을 냈다.

이처럼 과기·산업계가 한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변리사 대리를 막는 현행 제도가 소송을 장기화해 사회적 손실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문적인 기술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변호사가 변론 기일을 연장하는 경우가 잦아 소송이 길어지고 비용 부담도 급증했다는 주장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특허침해 소송의 1심 처리 기간은 평균 606일로 일반 민사소송(297일)의 2배 이상이다. IT 기업의 한 법무 담당자는 “변리사가 해당 회사의 특허기술을 아무리 잘 알아도 특허침해 소송대리는 금지돼 변호사에게 과외하듯 일일이 기술을 설명해 줘야 한다”며 “막상 법정에서 변호사가 그 내용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방청석의 변리사가 쪽지로 답변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다급한 기업은 변호사·변리사 협업팀을 갖춘 대형로펌을 찾지만 비용이 1억원 이상인 경우가 많다. 연간 영업이익 평균이 1억~1억2000만원 선인 중소·벤처기업들은 엄두도 못 내는 규모다. 비용 부담 때문에 대다수 중소·벤처는 특허를 침해당하고도 소송을 포기하고 있다.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기업과 대형로펌 간 ‘그들만의 리그’를 현행 제도가 열어준 셈이다.

일본은 이미 2002년에 변리사 공동대리를 도입했고, 중국은 변리사 단독대리도 가능하다. 노키아·아스트라제네카 등 유력 기업들이 변리사 대리를 요구한 유럽연합(EU)은 내년부터 유럽변리사의 유럽통합특허법원 단독대리를 허용한다. 이들과의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우리도 변리사 대리를 허용해야 한다는 게 과기·산업계 요구다.

국회 산자위에서 이번 개정안에 찬성한 변호사 출신 A의원은 “법안 막아달라는 전화와 문자폭탄 등 온갖 곳에서 압력을 많이 받았다”며 “왜 십수년간 국회에 매번 제출되면서도 문턱을 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됐고, 변호사 직역단체의 힘도 많이 느끼고 있다”고 했다.

공은 이제 전체 위원 18명 중 12명(67%)이 판사·검사·변호사 출신으로 포진된 법사위로 넘어갔다. 벌써부터 “법사위 통과가 월드컵 16강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법조인 출신 법사위원들은 “국회의원들은 변호사의 직역과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평범한 법률 소비자들의 이익과 편의가 어디에 있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A의원 발언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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