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칼럼] 中·러 앞에 서면 작아지는 韓 인권외교
유엔 규탄성명·결의안에 연속 기권
“글로벌 중추국 도약” 정부약속 퇴색
언제까지 갈지자 행보 계속할 건가
인간의 야수성과 잔인성은 전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유대인 600만명이 학살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중국인 35만명이 희생된 군국주의 일본의 난징대학살은 인류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2차 세계대전과 중일전쟁의 ‘킬링필드’ 현장에서 인권이 설 자리는 없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해선 안 될 독재국가들의 인권유린 참사들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인권유린 실태에 비춰보면 정부의 결정은 납득하기 힘들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이 분리독립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180만명을 직업교육훈련센터(VETC)에 수감하고 인권을 무참히 침해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고문과 성폭행을 당하고 언어와 종교를 버리도록 강요받는 실정이다.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G2(주요 2개국) 대국 중국의 민낯이다.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우크라이나 크름반도의 인권 상황도 악화일로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우크라이나 인권단체 ‘시민자유 센터(CCL)’는 크름반도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2만1000여건을 수집해 폭로했다. 임의 체포와 고문, 불법 처형이 다반사고 우크라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면 해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회만 있으면 자유, 인권, 민주주의, 법치 등 가치 기반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 위상에 걸맞은 책임을 다하는 글로벌 중추국이 되겠다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말도 수없이 했다. 이런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의 인권유린에 눈을 감은 것은 이율배반적 행보다. 국격 추락을 자초한 하책이 분명하다. 인권 정부를 자처했으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의 인권 이슈에 관심을 껐던 문재인정부와 다를 게 뭔가.
중국의 인권유린 규탄 성명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50개국이 참여했다. 러시아 인권 규탄 결의안에도 78개국이 이름을 올렸다.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자유·민주 진영 국가 대부분이 찬성표를 던졌다. 50개국, 78개국이 동참한 인권개선 활동에 불참하면서 글로벌 중추국이 되겠다는 건 과욕이다.
이런 정부가 지난달 31일 북한인권결의안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중국·러시아와 북한에 적용한 인권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일관성 있는 인권외교 원칙과 기준이 없다는 방증이다. 이중잣대를 들이대며 선택적 인권외교를 하는 한 결코 인권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갈지자 행보가 한국 인권외교의 트레이드마크가 될까 우려스럽다.
외교부는 “국익이나 여러 관점을 종합 고려했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는 변동이 없다”고 해명하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물론 인권 문제에 민감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자극하면 보복이 가해질 수 있음을 우려한 고육책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중국·러시아의 인권탄압에는 결연히 반대를 했어야 옳다. 그것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글로벌 중추국을 꿈꾸는 나라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이제 외압에 쉬이 흔들리지 않을 국력이 있잖은가. 한국 인권외교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호기를 차버린 것은 한심한 일이다.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인권외교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정도를 걸어야 한다.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는 하나의 집합체다. 인권 존중은 문명 평가의 지표”(평화운동가 이케다 다이사쿠)라는 말을 깊이 새기길 바란다.
김환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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