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말고 공민이 되자” 베이징서도 분노의 백지·촛불

이종섭·박은하 기자 2022. 11. 2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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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0여개 대학까지…들불처럼 번지는 ‘백지 시위’
중국 베이징에서 27일 한 여성이 정부의 코로나19 통제조치에 항의하며 백지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종이에는 코로나19 통제 때문에 제때 진화가 이뤄지지 못한 신장 우루무치의 아파트 화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촛불이 그려져 있다. 베이징 | 로이터연합뉴스
시민들 거리 나와 반정부 구호
검열 항의 명언으로 처벌 회피
홍콩·대만 등서도 연대 시위
시진핑 3기 한 달여 최대 위기
강경 진압 땐 공안정국 우려도

중국에서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烏魯木齊)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당국의 검열과 코로나19 통제 조치에 항의하는 ‘백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상하이에 이어 수도 베이징 도심에서도 수백명의 시민들이 모여 집단 시위를 벌였고 홍콩과 대만 등 각지에서도 연대 시위가 펼쳐졌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3기를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최대 위기를 맞은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어떤 대응책을 내놓을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 베이징서 이례적 가두 시위

지난 27일 저녁 베이징 차오양(朝陽)구 량마허(亮馬河) 주변에 촛불과 백지를 든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백지를 손에 들고 “봉쇄 대신 자유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CNN 기자는 시위대 규모가 점점 불어나자 시민들이 베이징 3환도로(제3순환도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시민은 최소 수백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베이징 도심에서 이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이례적이다. 량마허는 시내 중심부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6~7㎞ 떨어진 도심 하천으로 주변에 각국 대사관과 호텔, 상업시설 등이 밀집해 있다.

시민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문화혁명 말고 개혁이 필요하다’ ‘영수 말고 선거권이 필요하다’ ‘노비 말고 공민이 돼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지난달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앞두고 베이징 도심에 기습적으로 내걸린 현수막 속 반정부 구호가 다시 터져나온 것이다.

상하이에서도 이틀째 시위가 이어졌다. 지난 26일 밤 상하이 우루무치중루에서 ‘공산당은 물러나라’ ‘시진핑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다 새벽에 강제해산된 시민들은 같은 날 오후 ‘구금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인근 지역에서 밤늦게까지 산발적 시위를 이어갔다.

같은 날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도 우루무치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독재에 반대한다’ ‘우리는 황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쳤고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지는 등 지난 주말 사이에만 적어도 중국 내 7~8개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50여개 대학에서도 학내 시위가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검열에 이골이 난 누리꾼들은 삭제될 가능성이 적은 국가 지도자의 연설이나 명언을 인용하는 방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국무원 서기장의 연설에 등장하는 “인민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말한 “하나의 불꽃이 들판을 태울 수 있다”는 구절을 공유하는 것도 당국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프리드만 방정식을 내세운 시위도 등장했다. 프리드만이 자유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프리덤’과 발음이 비슷한 것에서 착안했다.

“좋아, 좋아, 좋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등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온라인에 올리는 것도 검열을 피하면서 풍자하는 수법으로 사용된다.

■ 당국 대응이 시위 양상 가를 듯

이 같은 이례적인 대규모 시위는 지난 24일 신장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아파트 화재 참사가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배경은 장기화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누적된 시민들의 불만이다. 중국에서는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봉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불만이 쌓여왔다. 최근 전 세계가 들뜬 분위기 속에 카타르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민심을 자극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월드컵을 보며 “누구는 마스크도 안 쓰고 경기를 관람하는데 우리는 한두 달씩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문제는 시위가 어떤 양상으로 번져나가느냐다. 이번 시위의 상징물로 떠오른 백지는 당국의 검열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시에 반체제적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 경우 가해질 수 있는 처벌을 피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지 시위는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 때도 동원됐다. 백지 시위는 홍콩과 대만 등 중화권을 넘어 미국과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세계 각 지역에서의 연대 시위로 확장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시위가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 이후 중국 정부에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방 정부들은 일단 성난 민심 달래기에 나선 모습이다. 시위 발원지인 우루무치시는 이날부터 중단됐던 대중교통 운행과 상점 운영 등을 점진적으로 재개하며 봉쇄를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베이징시는 봉쇄 기준을 엄격히 준수하고 소방 통로와 아파트 입구 등을 단단한 재질의 울타리로 막는 것을 엄금한다는 지침을 내놨다.

하지만 감염자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가 계속 확산되고 정부가 강경한 대응책을 선택한다면 2019년 홍콩 반정부 시위 때와 같은 공안정국이 조성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영국 가디언은 “시진핑 주석은 이번 시위를 코로나 정책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며 홍콩에서 사용한 무자비한 방법이 본토에서도 동원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박은하 기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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