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왕의 온돌방’ 세상에 나왔다…조선보다 2배 긴 ‘열선’

노형석 2022. 11. 2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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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24대 임금 원종(1219~1274)은 고려사에서 마지막 대왕으로 꼽힌다.

<고려사> 를 보면 묘지사는 고려 원종 5년이던 1264년 왕이 임시수도 강화섬의 마니산 참성단에서 초제(醮祭: 도교에서 별의 신령들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지내기 전 머물렀던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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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제사 중 머문 묘지사 추정 절터서 발견
건물터 평면 현황 설명사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려왕조 24대 임금 원종(1219~1274)은 고려사에서 마지막 대왕으로 꼽힌다. 1258년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선왕 고종이 이듬해 몽골제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강화한 직후인 1259년 즉위하는데, 태자를 원나라 몽골황실 여인과 결혼시키면서 원의 제후국으로 고려가 예속된 까닭이다. 그래서 원종 이후 후대 임금들은 세상을 떠난 뒤 ‘~종(宗)’, ‘~조(祖)’ 등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 칭호만 받게 된다. 그는 13세기 초 고려가 30년 항몽전쟁을 벌일 당시 피난수도 강화도(강도)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복귀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빚어낸 고려 원종이 피난수도 강화에서 하늘 제사를 지내기 전 몸을 녹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옛 절집의 대형 온돌방이 세상에 다시 나왔다. 고려시대 대형 온돌 구조의 건축 시설물이 온전하게 발견된 것은 처음이어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건물터 서쪽에서 바라본 온돌 시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건물터 동쪽에서 바라본 아궁이와 온돌 시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원종이 강화 마니산에 제사를 지낼 때 머물렀던 절로 <고려사>에 기록된 강화군 하도면 사기리 묘지사(妙智寺) 추정 절터 유적에서 대형 온돌 얼개로 채워진 건물터를 발견했다고 28일 발표했다. <고려사>를 보면 묘지사는 고려 원종 5년이던 1264년 왕이 임시수도 강화섬의 마니산 참성단에서 초제(醮祭: 도교에서 별의 신령들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지내기 전 머물렀던 사찰이다.

이번에 조사한 묘지사 추정 터는 마니산 동쪽 초피봉 남쪽 사면에 있다. 그동안 학계의 조사를 통해 절터 추정 장소는 얼추 찾아냈으나 정확한 위치나 연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 조사 성과의 핵심은 절터 추정 유적 윗부분에서 축대를 쌓아 조성한 평탄한 건물터를 확인한 것이다.

건물터는 동서 너비 16.5m, 남북 길이 6.3m에 이르는데, 특히 위쪽에서 동쪽 일부를 제외한 방 전체에 거대한 온돌 구조물이 촘촘히 깔려 있다. 건물은 가로 5칸, 세로 2칸 크기로 추정되며 건물터의 동서 양쪽에 따로 아궁이를 두어 두 영역의 온돌 난방 구조가 분리된 채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는 “온돌 아궁이는 건물터의 동쪽 칸과 서쪽 돌출부에 조성돼 있었다”며 “각각의 아궁이를 통해 유입된 열기가 ㄷ자 형태의 고래에서 퍼져나가면서 방의 양쪽을 덥힌 뒤 연기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얼개”라고 설명했다.

위에서 내려다 본 강화 묘지사 추정 절터의 전경.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온돌방에 설치된 고래둑은 너비가 40~60㎝로, 기존에 확인된 조선시대 건물터의 고래둑 규모 20~30cm보다 훨씬 더 크다. 그 위에 얹은 구들장 길이도 70~120㎝로, 지금껏 국내에서 확인된 다른 온돌 시설물보다 월등한 규모를 지녔다.

학계에서는 방 전체에 놓은 전면 온돌형 구조의 대형 주거시설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추정해왔는데, 이번에 발견된 유적은 13세기 것으로 시기가 가장 이른 전면 온돌 시설물의 시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지대하다는 평가다.

연구소는 “발굴된 전면 온돌 구조물의 방대한 얼개나 규모로 미뤄 왕실 등의 권력자가 썼을 가능성이 크다”며 “내년에 묘지사 추정 절터의 나머지 아랫쪽 축대 부분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구체적인 전모와 실체를 밝혀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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