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20>] 노욕(老慾)은 ‘몸 망치고 명예 잃는(身敗名裂)’ 지름길

홍광훈 2022. 11. 2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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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련(魯仲連)을 기념하는 사당의 본당. 산둥(山東)성 서쪽 끝 랴오청(聊城)시의 츠핑(茌平)현에 있다. 청대에 세워진 것을 1990년대에 중수했다. 사진 바이두

공적(公的)으로 세상에 크고 작은 이름을 알린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공적(功績)이나 능력이 있어서 거기에 어울리는 지위에 오른 사람과 권력자나 인사권자와 친분이나 연줄로 한 자리 차지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공적이 크고 능력이 많으나 대가를 얻으려 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공을 이루고 머물지 않는다(功成而不居)”라거나 “공을 이루고 명예를 얻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成名遂, 身退, 天之道)”라는 노자(老子)의 말은 이런 이들에 대한 칭송이다. 이백(李白)이 가장 존경했다는 전국시대 말기의 노중련(魯仲連)이 바로 이 도를 구현한 대표적 인물이다.

“태산이 높아 노중련의 절의를 낮춘다고 누가 말했나? 진군이 많아 노중련의 혀를 꺾는다고 누가 말했나?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니, 그 맑은 바람이 난향과 눈을 뿌리네 (誰道泰山高, 下却魯連節? 誰云秦軍衆, 摧却魯連舌? 獨立天地間, 淸風灑蘭雪).”

‘노송과 이별하며(別魯頌)’라는 시의 전반부에서 이백이 노중련을 이렇게 극찬했다. 나아가 다른 작품에서는 “나 또한 맑고 시원한 사람 되어, 옷자락 걷어붙이고 그와 함께 하려네(吾亦淡蕩人, 拂衣可同調)”라고 하여 세상에서 공을 이룬 뒤에는 그 행적을 본받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노중련은 ‘의불제진(義不帝秦)’이라는 고사로 유명하다. 서쪽의 진이 강성해 동쪽 나라들이 이로 인한 외환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진왕을 황제로 받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분연히 나서서 저지한 의거를 말한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뒤를 잇는 대표적 종횡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뛰어난 변설(辨說)의 재능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용하지 않고 천하의 대의(大義)를 위해 펼쳤다.

진의 대군이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위(魏)의 장수 신원연(辛垣衍)이 왕의 명을 받고 조의 실권자 평원군(平原君)에게 진을 황제의 나라로 섬기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때 마침 그곳에 머물던 제(齊) 출신의 노중련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여러 경우에 따르는 이해득실을 일일이 따져가며 열변을 토해 그 주장을 잠재웠다. 그의 말이 전해지자 진군은 포위를 풀고 50리나 물러났다. 이어서 위왕을 속인 신릉군(信陵君)이 원병을 끌고 와 진군을 격퇴했다. 이에 평원군이 노중련에게 봉지(封地)를 주려 하자 사양했다. 천금을 건넸으나 역시 거절하며 말했다. “남의 어려움을 구해주고 대가를 받는다면 장사꾼과 다름없습니다.” 즉시 그곳을 떠난 그는 평생토록 평원군을 만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제가 연(燕)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노중련이 진퇴양난에 몰린 적장을 설득하는 글을 보내 이를 말끔히 해결했다. 제왕이 그에게 작위를 내리려 하자 그는 바닷가로 가 은거해 버렸다.

이를 두고 서진(西晉)의 저명 문인 좌사(左思)도 ‘영사시(詠史詩)’ 8수 중 제3수의 전반에서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나는 노중련을 흠모하노니, 담소 자약하며 진군 물리쳤다네.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음을 귀히 여기고, 환난 만나면 풀 수 있었네. 공 이루고 상 받기 부끄러이 여기니, 높은 절조 뛰어나 그 짝이 없어라(吾慕魯仲連, 談笑却秦軍. 當世貴不羈, 遭難能解紛. 功成恥受賞, 高節卓不群).”

노중련이 만약 상을 받고 높은 자리에 앉아 계속 능력을 발휘했다면 그 결말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당시와 같은 난세에서 목숨을 보전하기는커녕 ‘고풍양절(高風亮節)’의 명예도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한 예는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춘추시대 말기 오자서(伍子胥)는 오(吳)가 초(楚)와 월(越)을 대파, 천하의 패권을 잡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제때 물러나지 못해 억울하게 죽은 비극적 인물이다. 원래 초의 귀족 출신으로 초에서 멸문지화를 당해 혼자 오로 망명한 그는 오랜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오의 대군을 이끌고 초를 공격, 멋지게 복수에 성공했다. 그 뒤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나, 왕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결국 두 번째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충언을 듣지 않은 오왕 부차(夫差)가 이끄는 오나라도 얼마 뒤 와신상담(臥薪嘗膽)한 월왕 구천(勾踐)에 의해 멸망했다.

같은 시기 문종(文種)은 구천을 도와 오를 멸하고 재상이 됐으나 구천의 시샘과 미움을 받아 큰 공을 세우고도 결국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그와 함께 월을 부흥시키고 오를 멸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던 범려(范蠡)는 큰 공을 이룬 다음 바로 보따리를 싸고 호수에 배를 띄워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떠나면서 문종에게 “날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을 감춰두고, 토끼가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는다(飛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는 말로 물러나기를 권유했다. 그 뒤 제로 간 그는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벌여 당대 최고의 부호가 돼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도왔다. 이런 그의 후일담은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기록돼 있다.

이와는 반대로 공적과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를 차지해 오랫동안 영화를 누린 사람도 적지 않다. 오대(五代·907~960) 때의 풍도(馮道·882~954)가 그 전형적인 인물이다. 불과 50여 년 사이에 왕조가 다섯 번이나 바뀌는 특이한 시대에 살았던 그는 네 왕조에 걸쳐 10명의 군주를 섬기며 70 넘어까지 20여 년이나 재상 노릇을 했다. 적국인 요(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2년 동안에도 벼슬을 받아 신하로 행세했다. 만년에 그는 ‘장락로(長樂老·길이 즐거운 노인)’라는 자신의 호를 붙인 자서전에서 평생 거친 관직을 죽 늘어놓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중에는 적국에서 받은 관직도 들어 있다. 이런 그를 두고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대체로 진보 성향의 인사들은 긍정적으로, 보수적 인사들은 부정적으로 본다.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저자 구양수(歐陽脩)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염치(廉恥) 없는 사람이 재상 노릇을 했으니 당시의 세상과 나라 꼴이 어땠을지 알 만하다.”

사마광(司馬光)도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새 왕조를 맞는 그의 태도를 “여관주인이 지나가는 손님 보듯 했다(若逆旅之視過客)”고 비유, “아침의 원수가 저녁에 주군이 되자 바로 얼굴과 말을 바꾸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다”라면서 ‘간신의 으뜸(奸臣之尤)’이라고 혹평했다.

결과론이지만, 염치와 인품은 차치하고 풍도가 정치적으로 뛰어난 능력과 경륜을 갖췄다면 왕조가 그렇게 자주 바뀌지 않았을 터이다. 나아가 오대십국의 혼란 국면은 더 일찍 종식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이리저리 비위를 잘 맞추는 ‘처세의 달인’일 뿐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누구나 세상 살면서 ‘하고자 하는(欲)’ 바가 있다. 그러한 욕구(欲求)가 없으면 개인이고 사회고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분에 넘치고 도가 지나치면 '탐욕(貪慾)'이 되고 ‘욕(辱)’이 된다. 역사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국경과 민족의 구분 없이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특히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노년의 욕심이 문제다. 젊을 때는 왕성한 혈기로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혈기가 식어 수그러들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욕심이 긍정적으로 작용해 좋은 결과를 얻으면 ‘노익장(老益壯)’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노욕(老慾)’이라는 지탄을 받는다.

법정 기준 노년이 한참 지났는데도 과거 한자리하던 인사들이 여전히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이득이나 명예를 좇으려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런 부류는 대체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自命不凡) 듯하다. 과거에 남보다 많은 영화를 누렸으면 물러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볼썽사납다. 민주화된 오늘날에야 노욕이 지나쳐도 옛날처럼 목숨을 잃는 경우는 없겠지만, 목숨 못지않게 소중한 명예를 잃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수한 강대국들의 지도자가 모두 노욕으로 제 나라 정세를 어지럽히고 국제 질서까지 뒤흔들어 수많은 대중을 힘들게 하고 있다.

세상에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데 인물은 이리도 없다는 말인가? 제아무리 능력과 경륜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때가 되면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문과 후원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인생도 시들어간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좋은 결과를 얻기는 지극히 어렵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전 서울신문 기자,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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