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이 ‘노치원’으로…저출생이 바꾸는 간판

권지담 2022. 11. 2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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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인천의 한 어린이집 건물에 요양원이 개원했다. <한겨레> 촬영 및 재가공

지난해 2월 김미숙(가명·50)씨는 경남 거제에서 18년 동안 운영했던 어린이집 건물을 시장에 내놨다. 해마다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된 탓이다. 2019년 59명이었던 원아가 한두명씩 줄기 시작해 2020년 코로나19 유행 뒤 10명 이상 감소했다. 정부가 영유아(만 0~5살) 1인당 보육에 필요한 일정한 금액을 어린이집에 지원하지만 원아가 급격히 줄면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김씨는 “각 반 담임 선생님과 차량 운전사를 줄일 수 없는 상황에서 원아가 줄면 원장은 월급 없이 일해야 한다”며 “남편 월급까지 보태는 기간이 길어져 가정까지 깨질 것 같아 어린이집 운영을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6년간 전국 82곳 어린이집→노인보호·요양 시설

그러나 90평(297.5㎡) 건물은 쉽사리 팔리지 않았다. 고민하던 김씨는 ‘노치원 컨설팅’ 모바일 커뮤니티에 어린이집을 팔고 싶다는 글을 올리고 매수자를 기다리고 있다. ‘요즘 노치원이 대세’라는 주위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老)치원’은 유치원처럼 노인이 다니는 돌봄 시설로 통용되는 말인데,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 하루 최소 3시간~최대 10시간 동안 머무는 주간보호센터(데이케어센터)를 일컫는다. 김씨는 “운영하던 어린이집이 전원주택이고 잔디밭도 있다 보니 노치원을 하겠다며 건물을 보러 오거나 전화 문의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올해 9월 인천 계양구의 한 어린이집 간판은 요양원으로 바뀌었다. 경매로 넘어간 원아 정원 159명 규모의 어린이집 5층 건물을 한지석(가명·58)씨가 매입해 요양원을 차렸다. 한씨는 “폐원 전 원아가 60여명 남아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린이집이 파산한 것 같다”며 “요양원은 (노인) 수요가 많은데다 장기요양기관이라 입소자 1인당 일정 금액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어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있으면 신고만으로 업종 변경

출생아 감소로 영유아가 줄면서 어린이집·유치원 자리에 주간보호센터·요양원 같은 장기요양기관이 들어서고 있다. 장기요양기관은 고령이거나 치매 등 노인성 질병이 있는 어르신을 위한 사회보험인 노인장기요양보험 수급자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곳이다. 요양원·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 같은 시설과 가정 방문 혹은 주간보호센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재가노인복지시설 등으로 나누어진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수급자가 이러한 기관과 이용 계약을 맺으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본인부담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기관에 지불한다.

최근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전국 15개 시·도에서 받은 ‘기초지자체별 장기요양기관 전환 현황’을 보면 2017년부터 최근 5년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으로 운영되던 곳이 장기요양기관으로 탈바꿈한 사례는 모두 82곳(요양원 41, 주야간보호·방문요양센터 41)이다. 이러한 전환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경기도(25곳)였으며, 경북(16곳), 충남(14곳), 인천(12곳), 광주(9곳), 경남(3곳), 충북(2곳), 울산(1곳) 순이다. 82곳 가운데 59곳(73%)은 2020년 이후 장기요양기관으로 바뀌었다. 경기도 동두천시 장기요양기관 승인 담당자는 “장기요양기관을 설립하겠다고 오는 10명 중 2명가량은 어린이집 운영 경험이 있는 분”이라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어린이집·유치원을 장기요양기관으로 전환시켜준다는 유료 컨설팅 업체도 많은 상황이다.

문턱 낮은만큼 돌봄질 담보 안돼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어린이집의 장기요양기관 전환을 가속화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영유아는 2017년 145만243명에서 2022년 8월 105만4928명으로 39만5315명이나 줄었다. 같은 기간 어린이집은 4만238곳에서 3만1099곳으로 약 1만곳 줄어든 반면, 장기요양기관은 2만377곳에서 2만7065곳으로 약 7천곳 늘었다. 더구나 장기요양기관 설립 장벽은 낮은 편이다. 어린이집과 장기요양기관 모두 건축법에 따라 같은 용도(노유자 시설군)로 분류돼 복잡한 허가절차 없이 신고만으로 시설 전환이 가능하다. 장기요양기관장 자격 요건은 어린이집 원장에 견줘 느슨한 편이다. 어린이집 원장이 되려면 보육교사 1급 자격을 취득한 뒤 3년 이상 보육 등 아동복지업무 경력을 쌓아야 한다. 장기요양기관장은 사회복지사 자격증(2급 이상)을 갖고 있거나 의료인(의사·간호사·조산사 등)이면 될 수 있다. 대구에서 25년 동안 어린이집을 운영한 강숙희(가명·59)씨는 “어린이집 원장 대부분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 노인 시설(장기요양기관)을 차리기가 수월한 것이 사실”이라며 “폐업 어린이집이 늘면서 원장과 교사 모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 의무화·공공성 확충 필요”

노인인구 증가 추세에 따라 민간에서 운영하던 어린이집·유치원이 장기요양기관으로 바뀌는 사례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장 변화를 계기로 돌봄 질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장기요양기관장을 대상으로 한 노무·인사 관리나 재무·회계 관리와 같은 교육이 있지만 의무도 아니고, 돌봄 공공성·정책에 대한 교육은 아예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양난주 대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현재 장기요양기관 수가 부족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폐업 어린이집 매입 등 계획적인 투자로 돌봄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8월 말 기준 전국 장기요양기관 2만7065곳 가운데 국가·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기관은 252곳(0.93%)뿐이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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