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기 동해의 무릉도원…동해시에서의 몽상

2022. 11. 2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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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서 동해로 내려오면 속초, 양양, 강릉 등이 나온다. 관광지로 워낙 많이 소개되는 지역들이다. 대안은 있다. 동해시, 삼척시 등 더 먼 곳으로 내려가 바다든 산이든 올라가면 된다. 우리는 명색이 설악산에 다녀왔으니 단풍 진 백두대간보다는 끝없는 상상력을 자극해 주는 해안 도시로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강릉 아래 동해시였다.

무릉의 꿈은 이미 이루어졌도다

동해시는 꿈의 도시이다. 오래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그 복잡한 산업단지를 달릴 때도, 어마어마한 덤프트럭들이 날려대는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을 때에도 ‘미래의 도시’, ‘판타지’가 생각나곤 했다. 그것은 문명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돌이킬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시멘트 원통이 도시를 갈라버리는 환경을 벗어나면 단박에 눈이 멀 것만 같은 푸르고 투명한 동해, 동해가 떠받치고 있는 그 시린 하늘이 울퉁불퉁한 생각의 길을 녹여버리곤 했었다. 그 바다를 상상하며 지상 1350m 지점에 다다르면 백두대간 중에서도 가장 굵직한 덩치를 지닌 두타산이 펑퍼짐하게 누워 계신다. 두타산은 석가모니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풍수에 환장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 누워계신 부처를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해서, 관동팔경을 유람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던 양반들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이 두툼한 두타산을 끊임없이 왕래하곤 했다. 매월당 김시습과 봉래 양사언 등 당대 문필가들은 기암괴석에 자신의 시를 새겨 두타산 바위를 거대한 시집으로 만들기도 했다. 김시습은 주로 시를 새겼고, 양사언은 석각을 제작했는데, 이들의 작품을 보았거나 소문을 들은 문필가들이 모두 너도나도 김시습, 양사언이 되어 자신의 작품들을 바위에 새겼다. 그때는 그게 풍류였다. 명필이든 악필이든 누구나 자신이 마음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동해시 아름다운 풍광의 시작과 끝은 두타산 무릉계곡이라 할 수 있다. 무릉계곡은 수행의 지점이다. 계곡 입구에 있는 무릉반석은 사람 수백 명이 한꺼번에 앉아 주제가 있는 수행을 하거나 인생 스승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을 담아낼 수 있는 곳이다. 계곡 입구에 있어서 마이크 없이도 화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바위 스피커’ 무릉반석은 이즈음 찾아가면 인적이 드물고 이상한 세계에 진입한 것 같은 착각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어디 무릉반석뿐이랴. 용추폭포, 쌍폭포, 호암소, 선녀탕, 장군바위 등을 마주하노라면, ‘내 가까운 곳에 평생을 두고 싶은 인물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만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내 옆에 평생 누가 있으면 좋겠어?’ 자신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해 보시라. 무릉계곡에서 명상을 해 본 사람에게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어?’ 물어보면, ‘내가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일까, 내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지. 결론 내지는 결론 가까운 결과도 얻을 수 있었고’라는 대답이 나오곤 한다. 누구나 이곳에 들어가면 마음의 미남미녀가 된다는 무릉계곡을 내려다보노라면 이곳이 이 세상인지 딴 세상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설악산 주전골 트레킹을 끝내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맛집에서 저녁과 아침을 먹은 후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해시로 내달린 것은 ‘강력한 중력의 끌림’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무릉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여행자는 이미 무릉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꿈이 이루어질 날도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절을 핑계대지 말자. 동해시는 곧 무릉의 세계였다.

추암 촛대바위가 좀 가늘어진 것 같다

추암촛대바위와 주변풍경
동해시에는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자연 유산이 하나 있다. 추암 촛대바위가 그것이다. 촛대바위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애국가 배경 풍경’이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해 뜨는 동해의 주요 배경으로 추암 촛대바위가 등장하곤 했었다. 나이가 든 분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특히 MZ급 세대는 ‘도대체 뭔 소리람’이라는 반응을 하곤 한다. 요새는 애국가조차 들을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보니 배경 화면에 추암 촛대바위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이미지가 유연하게 연결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어떤 세대에게는, 특히 자정이면 TV 방송이 무조건 끝이 나고 애국가가 ‘오늘 방송의 마지막 프로그램’이 되었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추암 촛대바위는 반복적이고 습관적이며 일상적인 장면이었다. 웅장한 바다에 뾰족하게 올라온 촛대바위는 진짜 불붙인 조명으로서의 촛불을 닮았고, 그 장면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을 들어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추암 촛대바위는 정말 오랜만에 보았는데, 암만 생각해 보아도 그 굵기가 살짝 가늘어진 느낌이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그 느낌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동해의 세찬 바람을 연중무휴로 맞고 있으며 역시 동시에 쏟아지는 염분 가득한 바닷물을 맞는 촛대바위의 풍화 속도가 과연 예사롭겠냐는 말이다. 물론 웃기는 생각이다. 인생 100만 년을 산 것도 아닌데 풍화 과정이 느껴진다는 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추암 촛대바위 앞을 떠나 출렁다리 근처에서 다시 촛대바위를 바라보니, 촛대바위가 가늘어 보인다는 착각을 일으킨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촛대바위 주변이 워낙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예전에 우뚝하게 보였던 촛대바위가 이제는 공원화가 된 것이다. 주변의 비슷비슷하게 생긴 바위들(석림)과 언덕, 해안선이 정돈된 상태가 공존하면서 예전에 압도적으로 보이던 추암 촛대바위의 ‘천상천하 유하독존’식 위용이 다소 순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 추암 촛대바위는 그 일대가 추암 공원이 되어 산책로, 조각공원, 해안공원, 먹거리촌 등 여행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이다.
추암 출렁다리
동해시 최남단 추암의 바로 아래는 삼척시 증산 해변과 한국의 산토리니를 꿈꾸며 건설했다는 쏠비치 삼척 등 매력적인 여행 포인트들도 줄줄이 있어서 수많은 여행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또한 추암, 증산을 지나는 해안도로는 부산시 오륙도해맞이공원과 강원도 최북단 고성군통일전망대를 잇는 한반도 동쪽 해안종추암 출렁다리단길 해파랑길의 33코스지역에 포함된다. 해파랑길은 자전거 여행 최애자들의 꿈의 루트이기도 하다. 해파랑길에서 만나는 모든 도시의 풍광과 맛집들이 자전거 여행자들의 페달 구르기를 멈칫하게 하지만, 특히, 오래된 시골 바닷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추암 촛대바위, 기암괴석 자연 전시장울 갖추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사로잡힌 명문명필가들이 자기도 모르게 추암 해변을 찾아 자신의 시와 문장, 편액을 능파대, 해암정 등에 휘갈리곤 했던 추암을 그냥 지나치기란 절대 불가하다 할 정도다.

촛대바위 앞 언덕 꼭대기에 있는 능파대는 촛대바위 일대를 제일 자세히 볼 수 있는 명당이다. 능파대에서 보이는 동해의 대표적인 풍경은 촛대바위와 형제바위이다.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는 날은 바위에 남는 포말 뒤로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틈만 나면 능파대에 올라 동해를 면전에 두고 명상과 관찰에 빠져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파도가 잔잔한 날 바다는 마치 호수와도 같다. 거기에 달이라도 떠 주면 시가 저절로 나오고 어깨가 자동으로 들썩이게 된다. 이곳이 능파대가 된 것은 조선의 역대급 능력자이자 최악의 모사꾼으로 기억되는 한명회가 ‘고요한 바다의 모습이 마치 미인의(요즘 같으면 고양이라고 했겠지) 걸음걸이 같다’ 해서 그렇게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촛대바위는 두 기가 솟아 있었다고 한다. 크기도, 생김새도 비슷했는데, 1681년 강원도 지진 때 한 기의 중간 부분이 부러져 버려 오직 현재의 촛대바위만이 우뚝한 모습으로 빛나게 되었다고 한다.

추암해변 바다 석림
이처럼 숱한 풍경과 당대 문필가들의 기행문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슷비슷한 클라스의 사대부들은 물론, 문장으로 출세해 보려는 꿈을 지닌 ‘과거급제 꿈돌이’들의 발길도 끝없이 이어지곤 했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문장이 떠오르는데, 누가 추암 능파대를 마다 하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긴 당대 명문가로는 송강 정철, 우암 송시열, 그리고 이름없는 수많은 재야의 고수들이 있다. 유명해지지 않으면 이름은커녕 성씨조차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현상인가 보다. 추암에서 본 또 하나의 진풍경은 석림과 해암정이다. 석림은 돌 ‘석’자에 수풀 ‘림’자로 이뤄진 지형으로, 말 그대로 돌숲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돌의 크기와 모양이 비슷비슷해서 누군가가 소나무 전지하듯 다듬어 가며 가꿔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국의 석림을 본 사람이라면 추암의 석림을 보며 비웃을 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의 풍경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첫 번째 이유가 ‘인간을 압도하지 않고 늘 함께 한다’는 진실을 되새겨 보면 오히려 소박한 추암의 석림이 더욱 사랑스러워질 수도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석림이 자신의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의 피부를 쓰다듬고 끌어안고 돌과 셀카를 찍을 수 있게 허락할까.
추암해변 해암정 근처 석림
해암정은 그 석림 바로 옆에 있다. 희한하게도 해암정마저 예전에 비해 조금 작아진 느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친 바닷가 마을에 그냥 툭 던져놓듯 거친 모습이었던 해암정에도 정원이 생기고 정자도 깔끔하게 정비되고 나니 ‘작아 보인다’라기보다 ‘단정해 보인’ 것. 해암정은 사적 공간으로 지어져 공적 문화재로 자리잡은 암자이다.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낸 생활공간이자 서당이다. 바닷가에 지은 암자가 그 오랜 세월 소금물 먹은 해풍과 지독한 습기를 이겨내고 21세기에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 외에 표현할 말이 없다. 바닷가 마을은 자동차도 녹슬고 썩어 들어가게 하는 염분 대마왕인데, 이 정자는 어떻게 그 원형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를 수 있었을까.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처음 지었고, 점점 낡고 허물어져 가던 것을 조선 중종 25년, 1530년에 후손인 심언광이 다시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추암은 해변, 촛대바위, 형제바위, 석림, 해암정, 출렁다리, 조각공원 외에도 ‘관광전용열차’인 ‘바다열차’의 주요 역인 추암역이 자리잡고 있다. 바다열차는 ‘강릉역 ? 정동진역 ? 묵호역 ? 동해역 - 추암역 ? 삼척해변역’을 바다와 함께 달리는 아름다운 노선으로 사계절 바다가 보고 싶어 애끓는 사람들의 마음을 식혀주는 꿈의 노선이다. 앞으로 전철화 작업이 끝나면 동해중부선이라는 이름으로 KTX-이음이 정차하는, 그래서 더 먼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추암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암정은 삼척 심씨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 생활 공간 겸 서당으로 활용했던 유서 깊은 공간이다.
22세기를 꿈꾸게 하는 절벽 도시 묵호항

묵호는 울릉도로 출발하는 배가 떠나는 곳이다.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에 공통점이 있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묵호항 뒷쪽 묵호등대와 묵호동, 논골담길 등이 절벽마을을 이루고 있고. 그 절벽 정상을 오르내리는 길 또한 절벽에 붙어 있는 게딱지 같이 아담하고 예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점이다. 묵호항 절벽마을을 보며 해뜨는 ‘도째비골’(도째비는 도깨비의 방언) 고급 다운타운이 그려졌다. 이 시골 해안 절벽에 무슨 고급 다운타운이냐고 묻겠지만, 이탈리아의 친퀘데레, 카프리,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상상해 보았다. 모두 돌이 많은 지역이고 우리나라 또한 땅만 파면 돌이 나오는 지질을 갖고 있다. 묵호항은 도깨비 방망이 스토리가 있는 도째비골, 1941년에 개항한 묵호항의 크고 작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논골담길 등 많은 이야깃거리를 지닌 언덕 위 절벽 마을이다. 지금은 빈티지 감성 솟구치는 낭만의 언덕으로 적지 않은 연인, 가족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절벽 다운타운의 그랜드 디자인을 22~23세기에 맞춰 그리고 시뮬레이션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니 일단 마음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과 논골담길을 보노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산토리니의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이 떠올랐다. 해일 같은 자연재해는 사람과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제대로 대비하고 관리하면 끝이다. 세상이 뒤집어질 재앙이 벌어진다면, 그거야 뭐 어쩌겠는가.

논곤담길
현실로 돌아와 빈티지 느낌 가득한 논골담길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꽤 널찍한 곳임에도 불구하고(물론 주말이었지만) 마음이 드는 좌석에 앉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동해의 웅장한 바다가 펼쳐져 있는가 하면 가까운 골목과 화단에는 이미 인간에게 익숙해진,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항구의 고양이들이 놀다 눕다 뛰다를 반복하고 있다. 사실 흔해 빠진 게 길고양이인데 어째 만날 때마다 사진에 담지 못해 안달일까. 논골담길에는 카페 외에도 논골식당, 감성의 바다, 똥누는 아이, 나포리다방, 장화이야기, 묵호등대 등 쉬고 먹고 멍 때리고 궁금해 할 많은 공간이 있었다.

이 절벽마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절벽의 골목과 작은 집들이었다. 논골길은 해안도로에서 볼 때 논골 1길이 마을 사람들의 생업을 엿볼 수 있는 루트, 그들의 일상이 보이는 논골2길, 평범한 삶이 존재하는 논골3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민폐와 예의의 기준만 확실하다면 볼 것 다 보고, 인사 나눌 것 다 나누고 짭쪼롬한 묵호항 특산물 정보, 맛집 이야기까지 얻어갈 수 있다. 이런 마을, 또 언제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바다와 마주보고 사는 게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글 이영근 사진 안동수(다큐PD), 문화재청 참고자료 동해시청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6호 (22.11.2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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