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여성백년사’ 이혜진 PD[플랫]

플랫팀 기자 입력 2022. 11. 28. 10:55 수정 2022. 11. 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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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문예지 ‘청춘’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3등으로 당선되며 데뷔한 작가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김명순은 여성 최초로 등단 작가가 됐다. 자신을 위로하고 세상과 맞서는 그의 작품은 당시 문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여성 문인으로서는 최초로 이름을 걸고 창작집 <생명의 과실>을 펴내기도 했다.

1922년 여성 최초로 단발을 한 강향란은 “나도 사람이며 남자와 똑같이 살아갈 당당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의지하고 또는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 근본으로부터 그릇된 일”이라며 “나도 남자와 같이 살아보겠다”고 말했다. 남자 옷을 입고 남자 강습소에 가서 수업을 듣다 쫓겨난 그는 상하이로 떠났다가 ‘서울에 번쩍 동경에 번쩍하는 여성 사회운동가’가 돼 돌아왔다.

📌[인터랙티브]세상을 고발한 여성들

📌교육·종교와 노동…100년 전 여성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공간 속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100년 전 신여성들의 삶을 비추고, 100년 뒤 여성에게 말을 거는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3부작은 지난 7~9일 방영됐다. 다큐멘터리는 1~2부에서 김명순, 강향란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기자가 된 송계월,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서 최초로 경제학과를 졸업한 최영숙, 최초의 여성 택시운전사 이정옥, 조선인 최초로 미용실을 연 오엽주 등 여성들을 시간여행을 통해 만났다. 3부에서는 현 시대 디지털성폭력의 원인을 살펴보고, 해결을 위해 연대했던 여성들을 비춘다. 방송을 연출한 이혜진 PD를 지난 22일 경기 일산 EBS사옥에서 만났다.

EBS 이혜진 PD가 22일 경기도 일산 EBS 사옥에서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의 제작 동기와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 PD는 “항상 여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여러 기획안을 썼지만 마땅치 않았다. ‘이왕 할 거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2020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하는 ‘1920 기억극장 황금광 시대’ 전시에서 힌트를 얻었다.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면 차별화된 콘텐츠가 나올 것 같았다”고 기획 과정을 설명했다.

EBS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에서 김명순 작가를 그린 장면. 여성 최초로 등단 작가가 된 김명순은 수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지만 계속 싸우며 글을 썼다. EBS 제공.

방송은 당당한 여성들의 성취만을 다루지 않는다. 신여성들은 눈에 띄었고, 남성들의 시기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김기진 평론가는 김명순의 작품을 “피부로 치면 육욕에 거친, 윤택하지 못한…퇴폐하고 황량한 피부가 겨우 화장분의 마술에 가려서 나머지 생명을 북돋워가는 그러한 피부”라며 폄하했다. 방정환은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김명순이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는 처녀시인”이라며 비난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강향란은 단발을 했다는 이유로 염상섭으로부터 “여자로서 본분을 잊은 행동”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신여성’의 기자였던 송계월은 고향에 들르면 “아이를 낳으러 고향집에 갔다”, 서울에 오면 “아기 아버지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신여성 나혜석은 거리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모든 신여성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여성백년사’는 요절한 여성들과 함께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난 여성, 다른 여성들과 힘을 합쳐 사회운동으로 이름을 날린 여성들도 담았다. 이 PD는 “(한국의 여성사를) 앞서간 여성들이 수난을 당하고 희생을 당한 역사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다.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여성 최초의 택시운전사 이정옥을 묘사한 장면. 이정옥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여자 운전수라니까 ‘히야까시(성희롱)나 좀 하자꾸나’라며 추잡스러운 농을 갈기기도 한다”며 “욕이나 실컷해주고 싶지만 직업 성질상 그럴 수가 있나. 더러는 말대꾸도 해주고 주정을 받아주는 척해주기도 하면 좋아들 한다”고 말했다. EBS 갈무리.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결성 등에 참여했던 정칠성, 여성노동인권을 위해 20척 높이의 을밀대에 올라 농성을 벌였던 강주룡 등은 대본까지 써뒀지만 분량 문제로 담지 못했다. 이 PD는 “시청자들이 감정적으로 와닿을 수 있는 사람, 현재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비춰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고심 끝에 등장인물을 정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하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아쉽다”며 “1920~30년대만 다뤘지만, 2020년대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있었겠나. 52부작을 해도 모자라다. 제가 아니어도, EBS가 아니어도 누군가 발굴하는 콘텐츠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각부 크레디트가 나갈 때까지 자료화면을 가득 넣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김란사,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 등 미처 소개하지 못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내 자신아, 얼마나 울었느냐,
얼마나 앓았느냐,

또 얼마나 힘써 싸웠느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느냐.

네 몸이 훌훌 다 벗고 나서는 날,
누가 너에게 더럽다는 말을 하랴
- 1921년 ‘개벽’에 발표한 김명순의 ‘칠면조’

이 PD는 등장한 여성들 중 김명순에 가장 마음에 쓰인다고 했다. “김명순은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했을 때, 절대 그렇게 못했을 것 같은 선택을 거듭한 인물입니다. 저 같으면 너무 공격을 많이 당하니까 ‘그만할까’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김명순은 멈추지 않고 자기 입장을 계속 글로 썼습니다.” 김명순은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소설로 쓰거나 자신을 공격하는 김기진을 겨냥하는 반박문을 기고했다. 작가로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기자로 활동했다.

‘여성백년사’는 3부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다뤘다. EBS 제공.

3부는 ‘n번방 사건’을 중심으로 현대의 디지털성폭력 사건을 다룬다. 처음에는 현대 여성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지만 ‘수박 겉핥기’가 되겠다 싶어 노선을 틀었다. 추적단 불꽃이 쓴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고 갈피를 잡았다. 이 PD는 “사건 자체를 기록한다기 보다는, 이 사건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신종 범죄가 아니라 오랫동안 범죄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100년 후 미래 세대에게도 똑같은 것을 물려줄지 묻고 싶었다”며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했는데 온라인 기반이다보니 기록한 영상물이 많지 않았다. 그 연대를 다큐를 통해 기록으로 남기려고도 했다”고 설명했다.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의 마지막 장면. EBS 제공.

부제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는 고심 끝에 정했다. 이 PD는 “제목이 너무 부정적이지는 않을까, 주제를 제목에 강하게 드러내도 될까 고민을 많이 했다”며 “그럼에도 강렬한 제목이 필요했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도 누군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라고 한다. 제목을 듣고는 ‘뭐가 틀린 거냐’고 묻기도 하고 ‘그럼 정답이 뭐냐’고 하기도 했다. 그런 다양한 생각과 질문이 나오는 게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3부의 마지막, 한 여성이 뚜벅뚜벅 걸어나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 PD는 이 여성이 누군지 특정하지 않았다. 디지털성폭력 피해 여성인지,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연대하는 여성의 평소 모습인지, 100년 후의 여성인지 시청자의 상상에 맡겼다. 이 PD는 “디지털 성착취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리셋’ 활동가들의 모습이 디졸브 되면서 이 여성의 방이 등장한다”며 “여성이 누구냐를 떠나 혼자인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주변에 지켜보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시지가 전해졌으면 했다”고 했다. 100년 뒤 여성의 삶은 어떨까. 그는 “적어도 ‘여성백년사’와 같은 기록을 보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경민 5km@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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