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MBC의 비극
● 언론노조와 진보학자 바깥에서 쓴 기록
● 朴 탄핵 직후 발표된 ‘언론부역자’ 101명
● 이사회 與野 구성비 바꾸는 추태 되풀이
● 노조가 특정 정권 지지하면 더 위험한 이유
● 정파 보도 피해자가 정파 보도 선두 서다
● 靑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에 대한 無보도
● 제도는 가만히 두고 인적 보복으로 대응
아직도 끝나지 않은 'MBC의 6·25 전쟁'
"170일 파업은 MBC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파업 후유증으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했다.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파업 때 내려가지 않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 동료로 지내던 사람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서로 싸워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170일 파업 때 어느 편이었느냐에 따라 양쪽 진영에는 건널 수 없는 골이 파였다."
김도인은 누구인가? 2019년 12월 출간된 '적폐몰이, 공영방송을 무너뜨리다: 언론노조의 MBC 장악 기록'이라는 책의 저자다. 1986년 MBC에 라디오PD로 입사해 2017년 2월 편성제작본부장이 됐지만, 언론노조가 '언론 부역자' '언론 적폐'라는 낙인을 찍어 탄압해 대는 바람에 1년을 채 못 버티고 2018년 1월 MBC를 퇴직한 방송인이다.
진보는 보수 쪽의 책을 읽지 않고, 보수는 진보 쪽의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작명과 구분법을 믿지 않으며 가소롭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소통을 위해 기존 용어들을 쓰기로 하자. 글은 진보 쪽이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김도인도 지적했듯이, "지금까지 상흔이 남아 있는 2012년, 2017년의 MBC 파업에 대해 언론노조와 진보 학자들의 관점에서 본 기록은 많았지만 반대편의 시각에서 본 기록은 거의 없다."
맞다. 이게 그가 책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간 MBC 문제에 대해 언론노조와 진보 학자들의 관점에서 본 기록만 접해 왔기에 이 책은 시각의 균형을 잡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이 책의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저자가 강한 주장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겪은 일을 비교적 차분하고 담담하게 기록하는 일에 충실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MBC의 6·25전쟁'에 대해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양쪽 모두를 비판하면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MBC의 6·25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2년 후인 2014년에 벌어진 한 풍경을 감상해 보자. MBC 소수노조인 제3노조 비대위원장 오정환은 중앙일보(2022년 10월 5일)에 기고한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MBC 보도국에서 한 남성 기자가 친구와 전화로 잡담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성 기자가 지나갔다. 남성 기자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전화 끊어. 재수 없는 X 지나간다.' 길거리 불량배가 했어도 비난받을 행동이다. 그러나 2014년 무렵 MBC에서는 나서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모욕을 당한 당사자 역시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남성 기자는 기세등등한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MBC본부' 소속 MBC 공채 기자였고, 여성 기자는 노조의 파업 기간 회사가 채용한 경력 기자로 언론노조 소속이 아니었다. 나중에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노조 측이 MBC 경영권을 장악한 뒤 이 남성 기자는 강한 정치색을 드러내며 승승장구했다."
문재인이 등 떠민 MBC 적폐청산
길거리 불량배가 했어도 비난받을 행동은 2014년에 끝난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부턴가 MBC는 아예 정치판이 됐고, 주요 정치적 갈등의 최전선이 됐다. 모든 비극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똑같이 자행된 역대 정권들의 공영방송 장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언론노조를 지지하던 방송인들이 방송 현장에서 쫓겨난 가운데 완성된 '어용 방송'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2016년 11월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로부터 이런저런 봉변을 당한 MBC 기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이러려고 기자 된 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MBC 기자라는 사실이 시대의 죄인이 된 기분이다." "MBC 취재진인지를 알아챌까 봐 마이크 태그마저 떼어낸 채 '몰래 중계차'를 타야 했다." "‘짖어봐'라거나 '부끄럽지 않으냐'고 호통을 치는 분들도 있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인터뷰를 시도하면 '배터리 아깝게 왜 찍으려 그러느냐' '청와데스크 말고 뉴스데스크에 나가는 거 맞느냐' 등등 조소와 비아냥거림만 날아들기가 다반사다." "집회 내내 취재진을 쫓아다니며 '여기는 MBC 기자들이니 인터뷰하지 말라'고 안내하는 시민들도 만나게 된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2017년 3월 21일 대선 경선 후보 토론회에서 "언론 적폐청산을 해야 하고, MBC가 심하게 무너졌다"고 비난했다. 5월 9일 대선에서 문재인이 승리함으로써 다음 날 문재인 정권이 출범함에 따라 MBC에서도 경영진 교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상 문재인이 적폐청산을 하라고 MBC의 등을 떠민 셈이었다.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김연국은 6월 2일 열린 노조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방송개혁 의지가 있어도 직접 나설 수 없으니 방송계 종사자, 시민사회단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끌어내려야 한다. 우리가 들고일어나 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
MBC 언론노조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5일 후인 2016년 12월 14일부터 2017년 6월 15일까지 총 3차에 걸쳐 101명을 '언론부역자'로 선정해 발표하면서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7월 15일, 2012년 MBC·KBS 양대 공영방송사 총파업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해고된 전 MBC 노조위원장이자 전 PD 최승호가 만든 다큐영화 '공범자들'이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 영화는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MBC·KBS 양대 공영방송에서 언론노조 소속의 기자와 PD들이 어떤 탄압을 받아왔는지를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최승호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공범자들'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언젠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12월,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대선이 있을 것 같았다. 정권이 바뀔 텐데 사장 임기가 정해진 공영방송은 '동토의 왕국'처럼 남아 바뀐 세상에 민폐를 끼칠 것 같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영진 물갈이 위한 MBC·KBS 동시 파업
"MBC 사장과 이사회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의 임기는 법적으로 보장돼 있지만, 다른 한 측면에서 그것이 무조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방통위가 (방문진의) 이사장과 이사를 임명하는 것으로 돼 있어서 임면도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사퇴를 포함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되는 것이다."
방통위가 방문진 이사와 KBS 이사의 해임을 통해 MBC·KBS 사장을 교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이어 민주당이 지원사격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당은 8월 3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공범자들' 시사회를 열었는데, 여기엔 추미애 민주당 대표, 우원식 원내대표를 포함한 전 지도부와 언론노조 MBC 본부장 김연국, 언론노조 KBS 성재호 본부장, PD 최승호 등이 참석했다.
9월 4일부터 경영진 물갈이를 위한 MBC·KBS의 동시 파업이 시작됐다. 다음 날엔 한국언론학회·한국방송학회·한국언론정보학회 등 3개 학회 소속 학자 467명이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언론·방송학자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공영방송의 핵심 가치인 독립성과 공정성, 그리고 언론자유를 훼손해 온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장 등은 즉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8일 '조선일보'는 '與 "KBS·MBC 野측 이사 비리 부각시키고, 시민단체로 압박"'이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를 보도했다. 민주당 전문위원실이 작성해서, 8월 25일 민주당 의원 워크숍에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공유했던 내부 문건을 입수해 보도한 것이다. 이 문건에 따르면, 민주당은 MBC 사장 김장겸, KBS 사장 고대영 퇴진 문제와 관련해 "정치권이 나설 경우 현 사장들과 결탁돼 있는 자유한국당 등 야당들과 극우 보수 세력들이 담합해 자칫 '언론 탄압'이라는 역공 우려가 있다"며 '방송사 구성원 중심 사장·이사장 퇴진 운동' 전개 필요성 등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이 문건에서는 '시민사회·학계·전문가 전국적·동시다발적 궐기대회, 서명 등을 통한 퇴진 운동 필요' '언론적폐청산촛불시민연대회의(가칭) 구성 및 촛불 집회 개최 논의' 등도 제안했다. 사장 임면권을 갖고 있는 이사진에 관해선 "야당 측 이사들에 대한 면밀한 검증을 통해 개인 비리 등 부정·비리를 부각시켜 이사직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 정부에서 자행된 언론 장악·언론인 탄압, 권언유착 사례 등의 언론 적폐 실상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고발하는 홍보·선전전을 전개해야 한다"며 해고·정직 등 징계를 당한 피해자들의 증언대회 개최, 영화 '공범자들'의 단체 관람을 제안했다.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문건의 주요 내용은 대부분 실천에 옮겨졌고 성공을 거두었다.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 이사들을 거칠게 압박해 자진 사퇴를 이끌어내고, 이사회의 여야 구성비를 바꿔 사장을 해임하는 '공식'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악성 추태였다.
‘어용방송'보다 더 위험한 '노영방송'
11월 13일 방문진 이사회는 재적 이사 9명 중 6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 5명, 기권 1명으로 사장 김장겸에 대한 해임안을 결의했고, 바로 이어 열린 MBC 주주총회에서도 사장 해임안이 의결됐다. MBC노조는 11월 14일 승리 무드 속에 72일간에 걸친 파업을 종료했다.11월 22일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은 팟캐스트 '새가날아든다'에 출연해 MBC노조에 대해 이런 기대감을 피력했다. "지난번에 파업할 때 내부에서 토론한 내용을 보면 그중에 '이제 불편부당, 중립 이런 거 취하지 않겠다. 진실과 정의, 그리고 객관보도의 늪에 빠져서 헤매지 말고 진짜 정론을 하겠다.' 이런 얘기들이 나온 걸 봤어요. 그래서 저는 그걸 지키기를 기대하는 거죠."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MBC는 '어용 방송'을 강요했던 권력보다는 자신들처럼 권력에 저항해 싸우지 않은 동료 방송인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보는 듯했다. 보도국 국·부장단 전원이 보직 해임됐고,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던 기자 약 80명은 이제 더는 뉴스 마이크를 잡지 못하게 됐다. 이후 16명이 해직되고 6명이 정직 6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친(親)노조 방송인들에게 가해졌던 보복이 이젠 반(反)·비(非)노조 방송인들을 향해 가해지는 비극이 재현된 것이다.
노조는 선과 정의를 대변하는가? 진보 진영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노영방송(勞營放送·노조가 지배하는 공영방송)에 별 문제의식이 없거나 바람직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영방송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위험한 점도 있었다. 노조가 특정 정권을 지지하면 노영방송은 사실상 어용방송이면서도 그걸 위장함으로써 저항 자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5년 2월 최초의 노조위원장 출신 MBC 사장이 된 최문순은 노조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최문순은 취임사에서 노조를 겨냥해 "생존을 위해 고통을 분담하자"고 했으며, 확대간부회의 석상에선 회사와 노조의 관계 재정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MBC에서 노조의 탄생은 공조직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조직이 행사해야 할 힘과 권위를 노조와 직능단체가 가져갔다. 이제는 여러분이 이를 바로잡아 공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공조직과 노조·직능단체는 생산적인 길항(拮抗) 관계여야 한다."
최문순은 '노조와의 대결'을 내세우며 임금 삭감 10%, 단일호봉제 폐지, 조직 개편 등 여러 공약을 내세웠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아마도 노조의 반대 때문에 좌절됐겠지만, 방송이 정권에 충성하는 한 내부의 그런 문제까지 신경 쓰고 싶진 않다는 정권의 태도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게다.
최승호가 이끄는 새로운 경영진은 두 번 다시 2016년 11월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끔 제도적 변화를 추구했을까, 아니면 적폐청산에 주력했을까? 비극적이게도 답은 후자였다. 문재인 정권은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먹고 들어선 정권이었기에 높은 지지율을 누리면서 적어도 초기 2년간은 순항하는 것처럼 보였고, MBC도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정권에 충성하는 보도가 문제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조국 수호' 선동 전위대 MBC
9월 28일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촛불 집회'가 열렸다. 민주당 측은 "20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친문 네티즌들은 MBC가 드론으로 집회 현장 상공에서 사전 허가 없이 불법 촬영한 영상을 인터넷에 퍼 나르며 "200만이 참가한 것이 확실하다"며 "MBC가 돌아왔다" "MBC는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언론"이라고 찬양했다. 이런 찬양에 고무된 MBC는 9월 29일 뉴스에서 추가로 드론 영상을 공개하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촛불의 물결이 더 뚜렷하다"고 했다. 뉴스 앵커는 "하늘에서 본 영상으로 집회의 규모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며 '200만 명이 모였다'는 주최 측 주장을 다시 보도했다.
9월 30일 박성제 MBC 당시 보도국장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9월 28일의 '조국 지지 집회'에 대해 "‘이건 10만 명 이상 올 수도 있겠다. 드론 촬영을 한번 해보자'고 했던 것"이라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을 다 봤지 않나. 100만 명 정도 되는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느낌이 있다. (집회를 드론으로) 딱 보니까 '이건 그 정도 된다'"라고 했다. 그는 "검찰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검찰을 비판하기도 했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건가? 공영방송이 '조국 수호'의 선동 전위대 노릇을 해도 괜찮단 말인가? 채 2년도 안 된 2017년 12월 MBC가 '참회 방송'에서 했던 다음 말을 잊었던 말인가? "촛불 집회는 축소하고 태극기 집회는 지나치게 확대해 보도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MBC 뉴스에 등을 돌렸습니다. 대통령과 태극기 집회는 국정농단 국면에서 MBC가 지켜야 했고 띄워야 했던 대상이었습니다. 태극기 집회 51만 명 참가라는 터무니없는 숫자를 그대로 전했고…."
이제는 그 반대로 가는 게 '공정 방송'이란 말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역대 어느 방송사의 보도국장이 그런 정치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적이 있었던가. 보수정권 치하에서 정파적 보복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피해자가 왜 세상 바뀌었다고 정파적 보도의 선두에 서야 한단 말인가? 박성제는 2017년 7월에 출간한 '권력과 언론'이라는 책의 결론에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숙명"이라며 "문재인 정권을 어떠한 각도에서 감시하고 비판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신뢰를 회복해 가려는 언론인이라면 이 같은 질문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묻고 답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던 나로서는 MBC가 대다수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MBC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MBC가 친문(親文) 나꼼수 출신의 주진우에게 사장 연봉과 맞먹는 출연료(회당 600여만 원)를 준다는 비판이 나왔다. 나중에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공영방송을 이런 식으로 이용해도 괜찮다는 것이었을까?
왜 시스템 놔두고 乙끼리 싸우나
10월 1일 MBC 'PD수첩'은 '장관과 표창장' 편에서 검찰이 조국의 부인인 동양대 교수 정경심을 사문서 위조 혐의로 기소한 사건을 다뤘다.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피디수첩' 보도는 검찰의 '동양대 표창장 위조' 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동양대 직원 등의 증언은 검찰 '졸속 기소'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수사의 신뢰도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동양대 교수로서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진중권은 이 방송에 대해 매우 비판적 입장을 취했는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10월 3일 광화문에선 대대적인 '조국 반대' 집회가 열렸지만, 이는 공영방송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국 사수' 집회엔 헬기까지 띄우고 50m 높이의 카메라용 크레인까지 세워 톱뉴스로 다룬 MBC는 광화문 조국 반대 집회는 아홉 번째 뉴스로 보도하면서 이를 "쿠데타 선동"이라는 여당 지도부의 목소리도 함께 보도했다. 이에 MBC 소수파 노조는 "서초동 집회는 자발적이고 광화문 집회는 '야당의 동원'이란 프레임을 짜고 있다"고 비판했다.
10월 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주변에서 '조국 수호'와 '조국 사퇴'를 요구하는 진보-보수 단체의 집회가 잇따라 열렸다. 방송은 이 집회를 어떻게 다뤘을까? 'KBS 저널리즘토크쇼J' 기자인 김덕훈은 "방송의 경우 대다수 언론사들이 검찰개혁 촉구 집회를 비중 있게 전하면서도 동시에 보수 단체의 집회를 진영 간의 대결 구도로 봤습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KBS는 '우리공화당 보수 단체, '조국 사퇴' 맞불 집회'라는 제목으로 관련 소식을 단신으로 보도를 했고요. SBS는 서초동 집회 소식을 다룬 첫 번째 보도에서 '이틀 전 광화문 집회에 이어서 다시 한번 진보와 보수가 거리 집회로 세 대결을 이어가는 분위기'라면서 우리공화당이 주최한 맞불 집회를 함께 다뤘습니다. (…)반면 MBC는 다른 방송사들과 상반됐는데. MBC는 당일 저녁 종합뉴스에서 검찰 개혁 집회를 톱뉴스로 전했지만 보수 단체 집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12월 13일 MBC 뉴스데스크는 '현대판 장발장'이란 제목으로 인천의 한 편의점에서 벌어진 절도 사건을 보도했다. 34세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우유와 사과 등을 훔쳤다가 잡혔는데 "너무 배고파서 한 일"이라는 사연을 들은 편의점 주인이 용서하고 경찰은 국밥을 먹여 훈방했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16일 문재인 대통령은 이 기사를 언급하며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다. 희망 있는 따뜻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MBC 뉴스데스크는 대통령의 발언을 주요 뉴스로 다시 소개했다. 그러나 이 뉴스는 며칠 뒤 '장발장'의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사실상 '가짜 뉴스'가 됐고, MBC 뉴스를 한껏 추어올린 대통령도 체면을 구겼다. 조선일보는 이를 "‘文비어천가' 일색… 낯 뜨거운 공영방송"의 한 사례로 지적했다.
2019년 11, 12월 정국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공작 사건으로 떠들썩했지만, 공영방송만 보면 이 사건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12월 중순 청와대 비서진이 후보 매수 등에 개입했고 이는 송철호 후보 출마가 대통령 뜻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KBS는 12월 18일 메인 뉴스에서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 MBC 뉴스데스크는 1주일간 울산시장 선거 관련 기사를 단 한 꼭지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불공정과 편파성은 문 정권 내내, 아니 문 정권 이후에도 지속된다.
善惡 이분법에 중독되다
만약 이전의 보수 정권들과 그 지지자들이 악(惡)이라면 이 모든 건 정당화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이하랴. 진보 진영엔 선악(善惡) 이분법에 중독돼 자신을 선(善), 반대편을 악(惡)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긴 했지만, 그건 마약중독이나 알코올중독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던 니체의 경고를 원용하자면 우리는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MBC의 비극'을 목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면 너무도 쉽게 망각하곤 했지만,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MBC에서 벌어진 일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MBC의 6·25 전쟁'은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였건만, MBC 사람들은 그걸 근본적으로 바꿔보려고 하기보다는 인적 보복 중심의 적폐청산으로 대응하는 잔인함과 어리석음을 반복하곤 했다. 적폐청산을 내면화한 못나고 못된 권력자들의 농간에 놀아난 '을(乙)들끼리의 전쟁'이었다. 이런 추한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MBC의 비극'은 자세히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연재할 이 글에 대해 독자들의 깊은 관심을 바라마지 않는다.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現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등 다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Copyright © 신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