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지가 '기록'한 명곡들을 향한 리스펙트 일기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2022. 11. 2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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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사진제공=아이에스티엔터테인먼트 

정은지의 리메이크 역사는 10년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서인국과 함께 쿨의 'All For You'를 불렀던 때로 거슬러 간다. 드라마와 노래는 큰 인기를 얻었고 그 인기는 에이핑크와 슈퍼스타K 출신이라는 수식어에 정은지와 서인국을 마냥 얽어둘 순 없다는 걸 확인시켰다. 해당 드라마는 또 같은 해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과 1년 뒤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와 더불어 90년대 붐을 촉발시키며 2022년 현재까지 열기가 식지 않고 있는 레트로의 역공을 위한 실질적 도화선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어느덧 서른 나이에 이른 정은지가 미니 앨범 형식을 빌려 다시 리메이크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그 유행의 역습이 반짝 현상에 머물지 않고 나름의 긴 호흡을 이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리메이크란 태생적으로 특정 아티스트를 향한 헌정을 내포하고 다시 부르는 사람의 음악 취향까지 가늠할 수 있는 이벤트란 점에서 이번 앨범은 결국 정은지가 좋아해온 뮤지션 및 음악에 대한 경의(respect), 가수로서 자기 취향의 역사를 고백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앨범 제목이 기록을 뜻하는 '로그(Log)'인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첫 곡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다. 밴드 버즈의 두 번째 앨범에 있던 곡으로 그룹 이오스(E.O.S) 출신 송라이터 고석영이 곡을 쓰고(버즈의 데뷔 앨범에도 곡을 준 그는 '겁쟁이'와 '비망록'도 버즈에게 건넸다) 작사가 겸 소설가인 한경혜가 그 위에 가사를 얹었다. 한경혜는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일년'과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 등 한 번 접한 이상 쉬 잊히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준 인물로, 그의 책 '작사가가 되는 길'의 내용을 빌리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의 노랫말은 "감정에 이입해 인물에 천착"한 느낌에 가까운 서사를 펼친다. 이는 가사 문장이 영상이 되게 하고('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 문장을 풍성하게 한다는 탁월한 비유를 아낌없이 쓰며('소금 같은 별이 떠 있고 / 텀블러 한 잔에 널 털어 넘기고') 가슴 벅찬 묘사는 물론('저 끓어 넘친 태양은 부글거리고') 울컥이는 다짐('지지 않을 너를 안게 될 거야')까지 촘촘하게 다져넣은 끝에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은 정은지에겐 "어린 시절 전재산을 코인 노래방에 탕진하게 만든 곡"이었던 동시에 그가 집에 혼자 있을 때 "방구석 여행을 하게 해준" 곡이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신나는 이 곡을 요리하기 위해 정은지의 조력자로 나선 이는 태연과 엔씨티드림, 레드벨벳 등과 작업한 밍지션(minGtion). 그는 인트로를 장식한 베이스 라인을 뼈대로 시원한 펑크 록 스타일로 갔던 원곡의 구성을 분위기 있는 피아노와 심벌 아래 코러스 인트로로 일단 멈춰 세운다. 곧 스티브 바이가 가미된 뉴메탈 풍 헤비 기타가 들어와 원곡의 질감을 챙기고, 원곡의 끝에 있던 템포 체인지는 더 극적으로 거듭나며 정은지의 추억 여행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사실 드럼과 베이스가 엮어낸 원곡의 공간감까지 놓치지 않은 이 편곡을 우린 얼마전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들은 바 있다. 프로그램 제목은 JTBC 걸그룹 메인 래퍼 보컬 오디션 프로그램 '두 번째 세계'였고, 심사위원 격인 보이스 리더로 출연한 정은지는 거기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앨범과 같은 버전으로 미리 열창했다.

사진제공=아이에스티엔터테인먼트 

정은지가 선택한 두 번째 곡은 YB의 '흰수염고래'다. 아마도 음악이 해내는 두 가지 주요 역할이란 기억과 위로일 것인데, 실제 사람이든 순간이든 음악은 대게 특정 기억을 간직하고 있고 그런 음악은 때로 강력한 위로의 수단이 되곤 한다. 윤도현이 밴드 멤버 허준과 함께 곡을 쓰고(인트로 피아노 멜로디는 리차드 막스의 'Right Here Waiting'을 살짝 떠오르게 한다) 스스로 노랫말을 지은 이 노래 역시 "듣는 사람에게 작은 위로를 줄 수 있는 음악"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날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윤도현은 길이 30미터, 몸무게 150톤의 흰수염 고래가 플랑크톤과 크릴새우만 먹고 산다는 걸 알았고, 이는 그대로 곡 '흰수염고래'의 제목과 가사의 영감이 되었다. 그러니까 존재가 곧 권력일 수 있을 집채만한 동물이 그런 물리적 조건과는 별개로 평온하게 사는 모습과 늘 아등바등, 티격태격 사는 우리네 모습의 대조에서 어떤 반성적 위로의 기운이 싹튼 셈이다. 그건 정은지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해나가고 싶은 '위로와 힘을 주는 노래'의 전형을 이 곡을 통해 보았다고 했다. 정은지는 이 트랙에서 가성 대신 진성으로 내지르는 윤도현식 창법에 충실하며 자신의 "노래의 지침"을 되새겼다. 그런 정은지의 목소리에 핀조명을 비춘 밍지션은 또한 40인조 오케스트라까진 아니지만 곡에서 없어선 안 될 현악 편곡도 따로 챙기면서 원곡의 거대한 그림자를 일부 받아들였다. '흰수염고래'는 유독 부른 사람(윤도현)도 들은 사람들(팬)도 똑같이 눈물 흘린 곡으로 유명한데, 아마 힘들고 지칠 때 이 노래에 위안을 얻은 정은지도 그랬을 것이다.

이어지는 '꿈'은 80년대를 자신의 시대로 누린 조용필이 뮤지션으로서 자신의 90년대,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계의 90년대를 힘차게 열어젖힌 곡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로 지역 인구가 몰려드는 광경을 보며 영감을 얻어 쓴 곡인 만큼 그 안에선 객지에서 감당하는 타지인들의 외로움, 좌절, 거기서 피어나는 희망이 묘하게 뒤섞였다. 긴 시간 리메이크 허락을 않던 조용필이 정은지 스스로 경험한 타향살이 사연을 듣고 끝내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필의 '꿈'은 음향과 연주 차원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한 곡이었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겸 작곡가인 데이비드 포스터와 작업했고 조지 벤슨, 패티 라 벨, 케니 로저스, 셀린 디온의 키보디스트 겸 프로듀서로 활약한 톰 킨을 비롯해 초절기교 기타리스트 마이클 랜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퀸시 존스의 메인 베이시스트 출신인 닐 스투벤하우스, 마이클 잭슨과 다프트 펑크의 드러머였던 존 로빈슨은 그런 조용필의 음악적 꿈을 이루기 위한 전제요 조건이었다. 당시 조용필은 '꿈'이라는 곡과 'The Dreams'라는 앨범을 통해 토토(Toto)나 스틸리 댄 같은, 사운드 면에서 완벽주의에 기댄 밴드들을 동경하는 듯한 편곡을 지향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2022년의 사운드와 플레이보다 더 세련돼, 밍지션 편곡의 경우 중후반부 피아노 솔로는 좋지만 무드와 비트감, 보컬의 호소력 면에선 확실히 원곡의 카리스마에 밀리는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끈질긴 의지와 노력 끝에 찾아낸 한국적 팝 사운드라는 거장의 음향적 성취는 드라마 '수리남'과 정은지의 이번 리메이크로 새삼 주목받게 됐으니, 정은지 버전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보인다.

사진제공=아이스티엔터테인먼트 

'사랑을 위하여'는 온 나라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떠민 1997년 외환위기 때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났던 곡이다. 곡이 태어난 사연이 경제적 문제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도 이 노래와 탄생 시기의 인연은 기구하다. 빚 보증을 잘못 서 집을 잃은 김종환이 친정으로 간 아내와 5년간 떨어져 지내다 새벽 일을 끝내고 아내에게 향하던 길에 마주한, 동 트기 전 양평 오빈리 강의 물안개를 보고 만든 '사랑을 위하여'는 창작의 사연이 사연인 만큼 김종환의 떨리는 허스키 보이스가 곡이 흐르는 내내 슬픔에 잠겨 있다. 하지만 슬픔 속에서 위로를 피워내는 것이 또한 음악의 기적이요 미덕이라 이 곡은 당시를 살았던 중년들의 피로를 보이지 않게 덜어준 고마운 멜로디로 모두의 기억에 남았다. 노래에 담긴 슬픈 사연은 알 길이 없었을 5살 정은지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운 '사랑을 위하여'를 멜로디언으로 엄마 앞에서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을 기특해하던 엄마 표정을 잊을 수 없어 이 노래를 이번 앨범에 넣었다. 편곡을 맡은 이현영과 박재범은 원곡의 애잔한 현악 파트와 드럼 비트를 덜어내고 보컬의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정은지의 담백한 노래가 반응하는 지점에 집중한다. 둘은 멜로디언으로 연주해 엄마에게 칭찬을 들은 정은지의 지난날 사연도 알았는지 간주를 비슷한 느낌으로 처리해 정은지의 리메이크를 보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끌어주었다.

"내 나이 서른 둘, 스펀지처럼 푸석푸석해진 나의 세상살이, 날 인정함으로 또 한 발 내딛어본다."

고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에 담긴 자신의 생전 마지막 정규 앨범 속에 저렇게 적어두었다. 서른 즈음은 그런 나이다. 푸석해진 세상살이 앞에서 날 인정하고 한 발 더 내딛어보는 그런. 역사에서 이 곡의 주인공은 김광석이지만 이 곡을 만든 주인은 강승원이다. 강승원은 1991년부터 스스로 음악 감독을 맡아온 KBS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마지막 방송에서 '서른 즈음에'를 직접 부른 일이 있는데, 그때 출연했던 김광석이 원작자의 노래를 듣고 반해 "돈을 뭉치로 들고" 찾아가 '서른 즈음에'를 자신에게 달라 했다고 한다. 돈 뭉치는 거절한 강승원은 결국 김광석에게 노래를 "그냥 가지라"고 주었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정은지는 이 곡을 고른 일이 팬들과의 "장난스러운 약속"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즉 '나 서른 되면 리메이크 앨범 낼거야'라고 말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약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나 서른 살이 되면 리메이크 앨범을 내겠어', 또 하나는 '나 서른 되면 '서른 즈음에'를 리메이크 할 거야'. 강승원은 이 노래를 '우리 동네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 그룹과 음악 생활 40년 만의 데뷔 앨범 '강승원 일집'을 통해 공식 음원으로 남겼다(후자에선 전인권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서 정은지는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할 김광석 버전을 따라 부른다. 따라 부르되 더 깊고 담담하게 부른다. 마치 김광석이 생전에 이 곡을 부를 때처럼, 즉 "내적으로 서른 즈음인 것처럼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스스로 가진 한계들을 느껴 답답한 느낌이" 든 것 마냥. 서른 살 정은지는 그렇게 '서른 즈음에'를 가장 그 노래답게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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