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 타자기와 짝이뤄 똑같은 문서 ‘뚝딱’ … 복사기 개발뒤 명맥만 유지[지식카페]

입력 2022. 11. 28. 09:36 수정 2022. 12. 2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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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한쪽 면에 잉크를 칠하거나 흑연을 섞은 왁스를 바른 뒤 말린 먹지(carbon paper)는 간단히 문서를 복제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애용됐으나 1959년 복사기가 탄생하고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그 수요가 차츰 줄어들었다. 아마존닷컴 캡처
1959년 탄생한 복사기는 사무 처리와 문서 관리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게티이미지뱅크

■ 지식카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19) 문서 복제 ‘카본페이퍼’

한 면에 잉크 · 흑연 · 왁스 칠 → 종이 덧댄 뒤 글씨 쓰거나 타자 쳐 복제… 기업 · 관공서 사무 효율성 제고

PC 보급이후 복사기마저 사라지고 디지털 정보의 무한 복제시대로… 미술 · 건축 특수용도로만 드물게 쓰여

약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세상에서, 똑같은 메모를 즉석에서 두 장 또는 세 장 써서 여러 사람에게 나눠 줘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림이 들어간 복잡한 메모라고 상상하면 실감이 더할 것이다.

복사기와 스캐너 같은 디지털 장비는 물론 없다고 하자. 사진이나 등사기와 같은 기술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을 찍어도 필름을 현상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며, 두세 장의 사본을 만들기 위해 철필로 등사 원본을 만들고 잉크를 칠하는 일은 지나치게 번거롭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이 먹지(carbon paper)라는 물건이다. 먹지는 종이의 한쪽 면에 잉크를 칠하거나 흑연을 섞은 왁스를 바른 뒤 말려 둔 것이다. 두 장의 종이 사이에 검은 면이 아래로 가도록 먹지를 끼우고 그 위에 글씨를 쓰면, 필압에 의해 먹지의 잉크가 아래 깔린 종이에 묻어 나오게 된다. 사이사이에 먹지를 끼우고 꼭꼭 눌러 쓰면 석 장 또는 넉 장까지도 똑같은 문서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먹지는 간단히 문서를 복제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다.

프린터 형식의 결제기가 보급되기 전에는 신용카드 영수증을 발급하는 데에도 먹지가 널리 쓰였다. 금융전산망 같은 것이 없던 옛날의 신용카드 영수증은 고객과 매장 그리고 카드 회사가 각각 한 장씩 보관할 수 있도록 세 장이 한데 묶여 있었다. 신용카드 위에 영수증을 포갠 뒤 문질러 주고(옛날 신용카드에 번호를 요철로 새겨 놓은 것은 이 때문이다), 금액과 고객 서명을 펜으로 적으면 한 번에 세 장의 동일한 전표를 찍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먹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간편하게 문서를 복제하는 데에 이용됐다. 하지만 먹지가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타자기라는 또 다른 기술과 짝을 지었을 때였다.

타자기는 물리적 압력을 주어 종이에 글자를 찍는 기계이므로, 먹지와는 궁합이 매우 잘 맞았다. 먹지를 처음으로 발명한 이는 이탈리아의 발명가 펠레그리노 투리(1765~1828)인데, 그가 1801년 먹지를 만든 이유도 자신이 개발한 타자기에 쓰기 위해서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대중화된 타자기들은 잉크를 먹인 리본을 때려 종이에 글자를 찍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것도 먹지와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먹지를 활용하면 타자기로 한 번에 여러 장의 문서를 손쉽게 복제할 수 있었고, 이것은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문서를 다루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여러 부서가 관련된 안건이라면 처음부터 먹지를 끼워 타이핑해 여러 장의 사본을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사무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먹지로 만든 사본은 ‘carbon copy’라고 불렀고, 안건의 주 수신자에게는 원본을, 참조해야 할 관련자에게는 사본을 보냈다. 문서의 수신자 이름 아래에는 사본을 받을 이들의 이름도 표기했는데, 주 수신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cc’라는 약칭을 붙였다. 주 수신자 모르게 사본을 받는 ‘숨은 참조’ 수신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보이지 않는 사본’ 즉 ‘blind carbon copy’, 줄여서 ‘bcc’라고 구별했다.

먹지와 결합한 타자기는 단순히 문서를 빨리 찍는 기계였을 뿐 아니라, 문서와 사무의 표준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타자기가 보급되면서 대부분의 사무용 문서는 표준 사이즈의 용지에 동일한 크기의 글자로 작성됐고, 문서의 여백이나 줄 간격 등도 타자기마다 숫자로 지정해 설정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문서의 분량을 가늠하기가 쉬워졌고 보관도 용이해졌다. 또한 수신자와 참조자 등을 명확히 구별하게 되면서 문서의 생산과 보관도 체계가 잡혔다. 기업들이 타자수를 고용하고 모든 문서를 타자하여 생산, 유통, 보관하게 된 것은 속도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타자기 시대의 먹지는 사무실의 필수품이 됐다.

하지만 영원한 기술은 없는 법이라, 먹지와 타자기의 시대도 전기 및 전자공학의 발달과 함께 서서히 저물어 갔다. 1959년 탄생한 복사기는 사무 처리와 문서 관리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먹지를 대고 타자하면 문서를 생산하는 시점에서 복제 여부를 결정하고 사본을 만들어야 했지만, 복사기를 사용하면 언제든지 간편하게 사본을 만들 수 있었다.

먹지로 복제할 수 있는 사본의 양이 최대 네댓 벌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복사기로는 훨씬 많은 양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물론 초창기의 복사기는 크고 비쌌으며 복제를 할수록 화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싸고 간편하게 몇 장의 사본을 만드는 데에는 먹지가 여전히 요긴하게 쓰였다. 하지만 복사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초창기의 단점은 빠르게 극복되었고, 먹지의 수요는 차츰 줄어들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사무자동화(OA)’의 열풍이 불면서 타자기의 지위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개인용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이 타자기를 대체했고, 문서를 복제하려면 복사기 앞까지 갈 필요도 없이 프린터에서 사본을 출력하는 것이 사무실의 새로운 일상이 됐다.

인터넷과 이메일을 이용한 사무 처리가 확산하면서 심지어 문서의 종이 사본을 출력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먹지와 타자기의 시대에 사본을 관리하던 약칭인 ‘cc’ 또는 ‘bcc’는 인터넷 시대에는 이메일의 참조나 숨은 참조 수신자를 구별하는 데 쓰이고 있다. 더 이상 먹지(carbon paper)를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는 종이로 된 복사본(copy)도 없지만, 오늘도 수많은 이메일 사용자들이 이름에만 흔적이 남은 ‘carbon copy’를 디지털 정보의 형태로 주고받고 있다.

현재 먹지를 생산하는 회사는 전 세계에 몇 군데 남아있지 않다. 미술이나 건축 등에서 특수 용도로 사용하고 있고, 손으로 쓰는 수표책 같은 데에도 여전히 먹지가 적용되지만, 더 이상 사무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먹지와 타자기를 이용한 복제는 물리적 과정이다. 타자기 활자가 종이에 가하는 압력이 뒤에 겹친 먹지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종이에 글자로 남는 것이다. 앞장에서 일어난 물리적 과정이 뒷장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재현의 강도는 반복할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먹지로 복제할 수 있는 사본의 양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

이와 비교해 정보화 시대의 디지털 사본은 문서의 형태나 인쇄 과정이 아닌, 정보 그 자체를 복제한 결과다. 정보 그 자체로만 문서가 존재하므로 언제 어디로든 정보망을 따라 주고받을 수 있으며, 무한히 복제해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디지털 정보의 강점이며, 사무자동화를 주창했던 이들이 공유했던 비전이기도 하다.

다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유한한 양의 사본만 만들 수 있다는 옛 기술의 특징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검열과 추적을 피해야 하는 지하출판물 같은 경우, 복제와 저장이 가능한 디지털 기술은 작성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먹지나 등사와 같은 옛 기술을 사용하여 적은 수의 사본을 만드는 편이 비밀 유지에는 오히려 유리하다.

실제로 구소련에서는 먹지를 이용하여 당국에서 금지한 책을 베껴 지하에서 유통하는 행위(사미즈다트)가 성행하기도 했다. 기술은 영고성쇠를 겪지만, 지나간 기술도 그에 맞는 자리가 있으며, 옛 기술이라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 법이다.

김태호 전북대 교수

■ 용어설명 - 사무자동화(Office Automation)

컴퓨터를 이용해 업무를 전산화, 자동화하여 사무 처리의 효율을 높이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궁극적으로는 모든 정보를 디지털 파일로 보관하여 ‘종이 없는 사무실’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형 컴퓨터가 개발되던 1970년대에, 미래에는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바탕으로 처음 제안됐다. 이후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문서의 작성과 유통 및 보관이 전산화되었고, 회계 업무 등도 수기를 벗어나 전산망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뤄지게 됐다. 오늘날에는 전산화, 자동화된 업무처리가 당연한 일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지는 않은 개념이지만, 이 말이 처음 주창되던 1970~1980년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말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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