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부, 규제 18건 없앨 때 與野는 71건 발의···규제공장 '국회'
총리실 하루 평균 1.38건 해소
野41건에 與도 30건 규제 양상
영향평가 없인 ‘깨진 독 물 붓기’
출범 200일(11월 24일 기준) 동안 윤석열 정부가 규제 혁신 과제 276건을 완료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루 평균 1.38건의 규제를 없앤 셈이다. 특히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정부는 18건의 규제 법률을 개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같은 기간 국회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71건의 규제 법안을 발의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들의 발목에 채워진 모래주머니를 없애줘야 한다고 강조해왔지만 여당인 국민의힘마저 동참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대한민국 국회는 ‘규제공장’이었다.
서울경제가 27일 국무총리실과 정부 규제정보포털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윤석열 정부 출범 뒤 정부는 1010건의 규제 혁신 과제를 발굴하고 법률 18건을 포함해 시행령 이하의 행정입법(고시·행정규칙 258건) 등 276건의 규제를 없앴다. 국무총리실도 연말까지 402건의 규제를 해소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윤 대통령이 취임 직후 “기업들이 모래주머니를 달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는 어렵다”며 “모든 부처가 규제 해소 부처라는 인식하에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국회는 정반대 방향으로 갔다. 더불어민주당이 41건(11월 25일 기준)의 규제 입법을 발의했고 정부의 규제 혁신에 힘을 보태야 할 국민의힘도 30건의 규제를 만들었다. 입법영향평가가 없다 보니 발의된 법안이 규제 입법인지도 모르고 법안을 양산한 결과였다.
국회입법조사처장을 지낸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입법영향평가에 대해 의원들이 입법권 침해보다 입법 지원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현재와 같은 입법 시스템으로는 규제 혁신이 ‘깨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역대 정부마다 규제 개혁을 한목소리로 외쳤지만 산업계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는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국내 규제로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4곳 중 1곳에 이를 정도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아무리 선의를 갖고 노력해도 국회에서 묻지마 발의가 지속되면 규제 혁신은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한다. 기존 규제를 개선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설·강화 규제를 관리하는 규제 시스템 개선에 역점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2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과 한국산업연합포럼의 집계에 따르면 의원 발의 법률안은 17대 국회 5728건에서 20대 2만 1594건으로 3.7배 늘었다. 21대 국회에서도 의원입법 건수는 전반기에만 1만 4144건을 기록, 20대 국회 전반기 대비 17.3%가 증가했다. 실제 여야는 21대 국회에서도 이륜자동차 및 주차장 관리, 공인중개사, 외국환거래, 드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각종 규제 법안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처럼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한 내용이 담긴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해 공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20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이 최종 제·개정된 사례는 총 1359건이었는데 규제가 포함된 법안은 203건으로 16.7%에 달했다. 21대 국회에서도 규제가 포함된 법안은 손쉽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21대 국회 전반기 기준 제·개정된 의원입법 중 규제를 포함한 비율은 15%로 집계됐다.
의원입법이 실제 공포까지 이뤄지는 경우는 주요 국가와 비교해도 지나치게 높은 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국은 최근 4년간 의원 발의 건수가 영국의 35.7배, 일본의 53.5배에 이른다. 1인당 의원 발의 건수 역시 영국의 78.9배, 일본의 131.5배로 나타났다.
정광하 한국산업연합포럼 미래산업연구소장은 “개별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최종 법률에 반영되는 비율이 미국·일본 등 주요 국가는 0.1%~1.5% 수준에 불과한데 한국은 무려 20%에 이른다”면서 “의원 1인당 법안 심의 건수도 81.9건으로 영국의 68.3배, 일본의 87.9배에 달해 충분한 검토 없이 법률이 만들어지는 점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함량 미달 법안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 20대 국회(2016~2020년)에서는 47건의 위헌 법률이 나왔을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위헌 법률이 한 해 5건 이상 나오는 사례는 전무하다.
이렇게 신설된 규제의 대부분이 경제적 규제로 분류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발표한 ‘규제정보포털로 본 규제 입법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신설·강화된 규제 법률은 총 304건(공포 기준)이었으며 이 중 절반에 달하는 151건이 경제적 규제였다. 진입 규제가 114건으로 경제적 규제에서 가장 큰 비중(75.5%)을 차지했다. 독과점·불공정거래 관련 경쟁 규제 22건(14.6%), 가격 규제는 15건(9.9%)으로 집계됐다. 특히 입법 주체별로 보면 의원입법이 271건(89.1%)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정부 발의와 다르게 의원입법은 입법영향평가를 거치지 않아 ‘규제 관리의 사각지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규제는 신생 기업의 성장 의욕을 꺾는 등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인 만큼 과잉 입법을 막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무역협회가 최근 스타트업 256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각종 규제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한 기업은 44.1%로 집계됐다. 이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 기업(22.3%)의 두 배 가까운 수준이다. 특히 설문 참가 기업의 25.4%는 ‘국내 규제로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매우 그렇다 6.6%, 그런 편이다 18.8%)’고 답했다.
정 소장은 “국회 내 ‘규제입법정책처’을 설립해 입법영향평가를 실시하고 미국과 영국에서 운영 중인 입법영향분석제도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의원입법 발의 요건을 최소 찬성 의원 20인으로 상향 조정하는 것도 단기적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도 “국회의 의원입법을 제어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서 “제어가 없다면 윤석열 정부 역시 이전 정부처럼 규제만 양산하는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기존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하면서 새 정부 규제 시스템 전반을 혁신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십시오.”(한덕수 국무총리 25일 규제개혁위원회)
한덕수 국무총리는 규제개혁위원회뿐만 아니라 규제혁신추진단 등을 주재할 때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인 규제 해소를 위해 경제단체와 민간 건의를 적극 정부가 수용해 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 결과 취임 이후 6개월 간 법률 개정 과제 18건을 포함해 276건의 규제를 없애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규제 ‘쓰나미’ 속에 2024년까지 1010건의 규제를 없애겠다는 목표에서는 한참 부족한 27.3%만 완료했다. 목표한 1010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734건의 규제 더미를 더 해체시켜야 하는 형편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한 총리는 ‘규제는 규제를 만든 부처와 사람이 가장 잘 푼다’며 자율권 카드를 내걸었다. 한 총리가 직접 단장을 맡은 규제혁신추진단에 한이헌·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등 전직 고위 관료들을 자문단으로 영입한 배경이었다. 추진단은 윤석열 정부 규제 개혁 최상위 기구인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한편 ‘덩어리 규제 해체’ 작업에도 힘을 싣고 있다.
추진단을 통해서도 규제 개혁이 어려울 경우에는 한 총리가 직접 메스를 들었다. 국가 위성 영상 중 고해상도 영상 배포 기준을 4m에서 1.5m로 완화해 ‘지도산업’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금융과 공공 분야에만 사용이 가능했던 ‘마이데이터’ 서비스를 통신과 쇼핑·헬스케어 등으로 확대한 규제 개혁이 대표적이다. 위성 영상 배포 문제의 경우 15년 동안 실무진 협의에 그쳐 매번 제자리걸음을 반복했지만 한 총리가 직접 관계 부처 장관과 규제 완화의 실타래를 풀면서 2개월 만에 해소됐다.
한 총리는 규제 혁신을 위해 국회의 협조도 절실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최근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한 총리는 “국회에서 규제에 대한 입법도 많다”며 “의원이 발의하는 입법안에 대해 국회에서 규제 영향을 검토하는 제도가 입법화될 수 있도록 국회 설득 작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양산되는 규제 법안에 해결해야 할 숙제는 더 쌓이고 있다는 게 정부 안팎의 분석이다.
국회의원들의 규제 입법 남발이 ‘과잉 규제 사회’의 원인으로 지목되자 국회 내에서도 제도적 해법을 찾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의원 법안 발의 과정에서 입법영향평가를 실시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다만 입법권 침해 소지 등의 문제가 있어 제도 개선이 현실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7일 국회에 따르면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은 ‘규제입법정책처법’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규제입법정책처를 신설해 국회 각 상임위원회가 법안에 규제 요소가 없는지 입법영향평가를 의뢰하면 이를 수행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국민의힘 규제개혁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도 비슷한 취지의 법안을 발의해 당론으로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배 국민의힘 의원은 이미 2021년에 법안 발의 시 ‘규제영향분석서’를 함께 제출하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의원입법에 입법영향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9년 전 보고서에서 의원 발의 법안에 규제영향평가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정부입법과 달리 의원입법은 절차가 단순하다 보니 입법권이 남발된다는 이유에서다. 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20대 국회의 의원입법은 17대 국회(5728건)에 비해 4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런 흐름은 21대 국회도 마찬가지다.
법안 발의가 늘어나니 규제 조항을 담은 법안 발의도 덩달아 증가했다.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0대 국회 의원 발의 법안 중 규제 법안은 3924건으로 19대 국회(1335건)의 3배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도 의원입법 발의 단계에 입법영향평가를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입법영향평가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데다 규제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자칫 입법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초선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사안에 따라 급히 준비해 법안을 발의해야 할 때도 있다”며 “그런 경우에도 일일이 평가를 받다 보면 입법권이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입법영향평가를 위한 기관을 새로 설치하는 경우 국회입법조사처와 업무가 중복되는 것도 문제다. 국회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규제 분석은 판단 주체와 기준이 불분명해 중요한 분석을 빠트리거나 형식적인 분석에 그칠 우려가 있다”며 “입법영향 분석에 긴 시간이 소요되고 이를 수행하는 기관에 상당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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