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김트리오 ‘연안부두’, 인천 프로야구팀 우승으로 이끈 응원가

2022. 11. 2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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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SSG 랜더스'가 창단 2년 만에 우승했다.

인천 프로야구팀은 주인이 누가 됐든 공통으로 쓰는 응원가가 있는데 바로 김트리오의 '연안부두'다.

그는 곧바로 매니저와 인천으로 가 노래를 수소문했지만 들을 수 없었다.

마침 훗날 '옥경이' '칠갑산' 등 히트곡을 낸 작사가 조운파를 만났는데 그가 연안부두를 배경으로 노랫말을 지어둔 것이 아닌가! 안치행은 곧바로 가사에 곡을 붙여 '연안부두'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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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발매된 김트리오의 앨범.

인천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SSG 랜더스’가 창단 2년 만에 우승했다. 인천 프로야구팀은 주인이 누가 됐든 공통으로 쓰는 응원가가 있는데 바로 김트리오의 ‘연안부두’다.

삼남매 김단·김파·김선으로 구성된 김트리오는 미군클럽에서 활동하는 가수를 길러내던 화양주식회사를 운영한 김영순과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 부부의 자녀다. 이 가족은 1973년 미국에 이민을 떠났다가 6년 만인 1979년 3월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부모를 닮아서인지 삼남매도 일찍이 음악에 두각을 나타냈고 실력은 프로 연주자와 견줄 정도로 출중했다. 그들은 제작자 안치행의 사무실에서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안치행은 최헌 ‘오동잎’,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가요계에서 ‘미다스 손’으로 급부상하던 제작자였다.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TBC 방송국의 한 PD로부터 인천에서 ‘연안부두’라는 노래가 구전돼 히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곧바로 매니저와 인천으로 가 노래를 수소문했지만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연안부두’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되새겼단다. 마침 훗날 ‘옥경이’ ‘칠갑산’ 등 히트곡을 낸 작사가 조운파를 만났는데 그가 연안부두를 배경으로 노랫말을 지어둔 것이 아닌가! 안치행은 곧바로 가사에 곡을 붙여 ‘연안부두’를 탄생시켰다.

안치행은 이 곡을 김트리오에게 줬고 1979년 1집을 발표했다. 김트리오는 팝송처럼 세련되고 뛰어난 연주를 보여줬다. 그런데 이 음반에서 유일하게 ‘연안부두’만이 트로트였다. 성공을 위해선 트로트를 넣어야 한다는 제작자의 결정이었다.

과거 인천 노래로는 1955년 박경원이 부른 ‘이별의 인천항’이 대표곡이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인천의 대표곡은 ‘연안부두’라고 해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인천 문학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다면 8회쯤 들리던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를 열창하는 팬들의 목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마도 인천 하면 인천상륙작전이나 월미도 여행 정도를 떠올릴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인천을 묘사한 구절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바로 시인 신경림이 쓴 <민요기행>에서 언급한 말이다. 그는 전국을 돌며 민요를 채집하다가 인천 연안부두에서 덕적도로 가는 배에 올라타 서해를 바라본 기분을 이렇게 적었다. “깨끗하고 맑은 동해보다 보기에는 구질구질하고 너절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짙은 서해가 나는 더 마음에 든다.”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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