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수사와 드라마

양민철 입력 2022. 11. 28.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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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철 사회부 기자


요즘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스포츠만 아니라 수사도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서초동에서 치열하게 펼쳐지는 ‘대장동 경기’가 떠올라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전개가 이렇게 흐를 줄 몰랐다. 대장동 일당과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대장동 의혹의 모든 걸 짊어진 채 시합은 조용히 끝나는 듯했다.

채널을 슬슬 돌리려던 차에 반전이 벌어졌다. 구치소에서 나온 유 전 본부장은 “1년을 참아왔다”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정조준한 직격탄을 쏟아냈고, 경기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일단 이 대표의 최측근 두 명이 잇달아 대장동 뒷돈 혐의로 구속되면서 형세는 이 대표에게 불리한 양상으로 흐르는 듯하다. 결과는 끝까지 지켜봐야 알겠지만, 경기에서 지는 쪽은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모습을 보며 떠오른 의문은 유 전 본부장이 아닌 수사팀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유 전 본부장의 입을 연 것일까. 일각에선 회유설을 제기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전향한 줄 알았던 포로가 아군을 적진 한가운데로 끌고 가면 부대는 순식간에 전멸할 수 있다. 나중에라도 유 전 본부장이 ‘그때 사실 회유당했다’고 하면 수사팀만 아니라 검찰 조직 전체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야당 의원들의 회유 의혹 제기에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 수사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재소자 회유 논란으로 검찰이 10년 넘게 시달렸는데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는 취지다.

유 전 본부장은 “진술을 바꾼 게 아니라, 그동안 안 했던 말을 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안 했던 말을 이제 와서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소회를 토로한 대목을 여러 번 다시 읽어봤다. “의리 하면 또 장비(삼국지 속 유비의 의형제) 아니겠나. 그런데 구치소에 있으면서 ‘내가 그럴 아무런 이유가 없었구나’라고 깨달았다.” “죄를 지었으면 흔적이 남는다. 부끄러움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같이 지은 죄는 같이 벌 받을 거고. 그 사람들이 지은 죄는 그 사람들이 벌 받을 것이다.” 진짜 속내야 알 수 없겠지만 그가 ‘형님들’ 두고 혼자 죽진 못하겠다고 결심한 건 분명해 보인다.

돌이켜 보면 대장동 수사팀 주요 멤버가 참여했던 국정농단 특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비선 실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 조카 장시호씨는 수사 주요 국면에서 단서를 제공해 활로를 뚫어줬다. ‘특급 도우미’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장씨는 특검팀에 “힘들었지만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는 손편지도 남겼다. 당초 장씨는 최씨의 용의주도한 참모처럼 알려졌었다. 그런데 정작 수사팀과 마주 앉은 장씨는 증거를 내밀자 관련 정황을 순순히 털어놨다고 한다. 본인의 죄로 1년5개월 징역을 살았던 장씨는 “무슨 잘못을 했는지 수사를 받으며 알게 됐다. 진정으로 반성했다”는 말을 남겼다.

고위직이 된 한 검사에게 “수사는 죄책감으로 하는 것”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그건 상식에 맞지 않는 일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동요를 쫓다 보면 수사는 의외로 쉽게 풀리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아무리 몰아세워도 꼼짝도 안 한다고 했다. “‘내가 돈 줬는데, 그게 어쨌다는 거요?’라고 할 때 속으로 ‘틀렸구나’ 싶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윗선도 배후도 절대 안 뚫립니다.”

사건 전개가 얼마나 드라마틱하든 유무죄 판단은 법원의 몫이다. 귀에 솔깃한 폭로일수록 재판부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엄격한 증명을 더 따진다. 결국 물증이란 얘기다. 유 전 본부장과 달리 이 대표 최측근들은 대장동 일당에게서 돈을 받은 의혹과 이 대표의 연관성을 모두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진상이 무엇인지는 검찰과 법원을 통해 판가름날 것이다. 어떤 결말일지는 알 수 없지만, 종료 호루라기가 울릴 때까진 쉽사리 채널을 돌리지 못할 것 같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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