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존귀하신 자제분’

황대진 논설위원 2022. 11. 2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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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의 주역 중에 ‘딸 바보’가 적지 않다. 나치 독일의 헤르만 괴링은 자기 딸 모습이 담긴 우편엽서를 전국 문방구에서 팔도록 했다. SS친위대 대장 힘러는 유태인을 처형하던 강제수용소 인근 허브 밭에 딸을 데려가 다정한 아버지 모습을 연출했다. 1000만명 넘는 국민을 학살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외동딸 스베틀라나를 ‘작은 참새’라 부르며 아꼈다. 북한 김정일도 생전에 김여정을 ‘여정 공주’라고 불렀다.

▶2018년 4월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방북했다. 김정은은 ‘핵 포기 의지가 있느냐’고 묻는 폼페이오 장관에게 “나는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내 아이들이 평생 핵무기를 짊어지고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답했다. 미국은 이 발언을 근거로 북미 회담을 장밋빛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당시 다섯 살이던 김정은의 딸 김주애가 요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두 ICBM 관련 행사다. 18일 ‘화성17형’ 발사에 이어 27일에는 당시 공을 세운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는데 딸을 데려갔다. 지난번엔 앞머리를 내리고 흰색 점퍼를 입어 어린이다운 복장이었지만, 이번에는 검은 코트를 입고 헤어스타일도 어머니 리설주처럼 꾸몄다. 관영 매체는 ‘사랑하는 자제분’에서 ‘존귀하신 자제분’으로 호칭을 높였다. 군복 입은 지휘관이 10세 전후의 소녀에게 상체를 숙이며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얼굴을 공개한 이상 김주애는 해외 유학을 보내지 않겠다는 얘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정은은 이날 ICBM 이동식 발사 차량(TEL)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내리고 메달, 훈장을 수여했다. 트럭에 영웅 칭호를 준 것은 어린 딸을 대량 살상 무기 행사에 데려간 것만큼이나 일반인의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아버지 김정일도 공장의 15톤 망치, 20미터 선반 기계에 영웅 칭호를 내린 적이 있다.

▶김씨 일가의 이런 행동은 상식을 뛰어넘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김정은은 고모부를 고사총으로 쏴 죽이고 이복형을 독살하는 광기로 권력을 공고하게 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ICBM 행사에 딸을 ‘미래 세대의 상징’으로 동원했다고 본다. ‘핵만이 북한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백두 혈통에 끝까지 충성하라’는 메시지가 담겼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핵 보유를 헌법에 명시하고 한국을 겨냥한 ‘핵 선제타격법’까지 만들었다. 김정은이 연출하는 온갖 기괴한 행태는 핵보유국으로서 바깥세상을 향한 공포 마케팅도 겸하고 있을 것이다.

황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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