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파치의 시간
꽃을 솎는 일은 나무에게서 나비를 빼앗는 일
이유 없이 헤어진다 한 꽃이 다른 꽃들과
비바람과 벌레와 새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줌으로
농부의 곁을 지켜주는 과일을 먹는다
파치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나는 나는
가슴에 몇백 개의 꿈을 더 가졌다
나는 갖가지 영혼의 양초를 파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상한 과일들이 빌려준 시간 속으로
성한 과일들이 들어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인 그림자 속으로
달콤한 햇빛 한 줌 기울어온다
조현정(1971~)
약간 벌레 먹은 것이나 비바람에 떨어져 멍이 든 복숭아를 싸게 사 먹은 적 있다. 파치 중에서 그나마 성한 걸 골라 팔고,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은 버려졌을 것이다. 배달된 복숭아를 칼로 도려내며 먹다 보니, 정품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농부는 온전한 과일을 생산하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봉지도 씌워줘야 한다. 꽃과 작은 열매를 솎아줘야 과실이 튼실해진다. 시인은 “솎는 일”은 “빼앗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시인의 남편은 과수 농사를 짓는 농부다. 몸이 아픈 시인은 자신을 파치와 동일시한다. 짐이라도 되는 양 미안해한다. 남편이 과수원에서 일하는 동안 시인은 “파치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난다. 아픈 몸이지만 꿈까지 포기한 건 아니다. 남편이 과일을 생산하듯, 시인은 “갖가지 영혼의 양초”에 불을 붙인다. 한 그루 나무가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처럼 시를 쓴다. “성한 과일들”은 “상한 과일들”의 희생으로 완성된다. 우리 삶도 누군가의 희생의 산물은 아닐까.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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