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냐 ‘연대’냐…어디로 튈까, 이란의 축구공

박용하 기자 2022. 11. 2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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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월드컵 열기 속 ‘히잡 시위’ 향방은
지난 25일 카타르에서 열린 이란과 웨일스의 조별리그 2차전 경기에서 이란 축구팬들이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알라이얀 | AP연합뉴스
침묵으로 연대했던 대표팀
2차전서 웨일스 꺾고 선전
세계 관심 끄는 계기 됐지만
정부가 통제에 이용할 수도
30일 미국전 앞두고 ‘긴장’

이슬람 율법의 모순과 함께 이란 정부의 권위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히잡 시위’의 여파가 월드컵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정부 시위에 연대하려는 축구대표팀의 국가 제창 거부가 팬들의 적극적인 연대 표현으로 이어지며 세계적인 관심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란 정부는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에서의 승리 이후 자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월드컵에서의 선전이 실제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긴장하는 모양새다.

■ 시위 연대 현수막 든 팬들

지난 25일 카타르에서 열린 이란과 웨일스의 조별리그 2차전 경기에서는 이란 반정부 시위에 연대하는 일부 축구팬들의 모습이 눈길을 모았다. 이들은 반정부 시위 구호인 ‘여성, 생명, 자유’가 적힌 현수막을 들거나,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을 찾았다. 아미니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뒤 의문사한 여성으로,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월드컵에서 표출된 이란 팬들의 연대 물결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것이다.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이 이란의 최고 인기 스포츠인 축구를 통해 연대를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시위 발생 뒤 이란 국내 축구 리그에선 몇달째 선수들이 골 세리머니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의 전 국가대표이자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던 알리 카리미는 반정부 시위의 상징이 됐으며, 현 대표팀의 공격수 사르다르 아즈문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

■ 일각선 선수들 ‘사형’ 걱정도

반정부 성향 독립매체 이란 인터내셔널은 26일 해킹단체 ‘블랙리워드’로부터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이란 정부가 이번 월드컵을 반정부 시위 국면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계획들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여기에는 대표팀 선수들에 대한 협박이나 금전적 보상을 통한 회유, 이란에서 파견한 관중을 통해 현지 분위기를 관리하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계획에도 축구대표팀은 지난 21일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고 시위에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더선 등 일부 매체는 “이란 선수들은 (귀국 뒤) 구금이나 처벌, 혹은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 뒤 2차전에선 일부 선수들이 국가를 부르는 등 비교적 온건해진 모습을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번 월드컵을 바라보는 이란 국민의 시선은 복잡하다. 월드컵에서 이란 대표팀의 선전이 이란 국내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정부가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30일 열리는 미국과의 경기는 이란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 전망이다. 적대 관계인 미국을 이길 경우 이란 정권에는 강력한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도 이란이 미국을 꺾자 국민들의 자부심이 현격히 커진 바 있다. BBC는 “이란의 많은 축구팬들은 막막함을 느끼고 있다”며 “대표팀의 선전을 기뻐하는 것이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위대를 배신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확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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