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의 ‘몫’] 돌봄과 애도연습

한겨레 2022. 11. 2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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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 참사가 벌어진 이후 국가가 '애도기간'을 선포했을 때, 우리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애도와 국가가 말한 '애도'는 너무나도 달랐다.

개인적인 상실을 함께 고민하는 일은 사회적 참사를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애도할지 고민하는 일과 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가 선포한 애도기간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갈 애도의 공동체가 일시적으로나마 열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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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의 ‘몫’]

2022년 11월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을 찾은 이들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기현 | 작가

이태원에서 참사가 벌어진 이후 국가가 ‘애도기간’을 선포했을 때, 우리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돌봄과 애도 연습’. 아픈 이를 돌보는 청년들 자조모임에서 처음으로 하는 공개적인 강연과 워크숍으로, 7월부터 조금씩 준비한 행사였다.

아픈 이를 돌보면서 병세가 악화하거나 사고가 날 때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때때로 불쑥 상실의 두려움이 찾아들지만, 혼자서 삼키는 것 말고 딱히 방법이 없다. 이미 떠나보낸 이들도 돌봄을 하면서 얽히고설킨 감정을 쉽사리 소화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떠나보내기 전에, 떠나보낸 뒤에도 함께 모여서 상실과 애도를 나눌 수 없을까? 좀 더 능동적으로 애도를 연습해볼 수 없을까? 이런 고민을 다양한 시민들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애도와 국가가 말한 ‘애도’는 너무나도 달랐다. 각자의 마음속에 갇힌 애도를 끄집어내 사람들과 나누려고 했는데, 국가는 사회적 참사 앞에서 애도를 다시 사적인 것으로 가두려는 듯했다. 애도라는 말의 전혀 다른 쓰임에 우리는 우왕좌왕했다. 그저 침묵하라는 애도기간에 행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진행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상실을 함께 고민하는 일은 사회적 참사를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애도할지 고민하는 일과 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시작한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다양한 상실의 경험을 서로 맞대보았다. 지금 돌봄을 하거나 떠나보낸 이들뿐 아니라, 앞으로 돌볼 사람에 대한 애증을 애도하려는 이도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를 떠나보낸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가족의 자살이나 범죄 피해의 유가족, 반려동물을 떠나보냈거나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보호자, 죽음뿐 아니라 일상의 크고 작은 이별을 고민하는 이까지, 서로의 감정과 기억을 차근차근 마주했다.

강좌와 워크숍을 통해 죽음과 애도의 시장화와 가족 중심의 장례가 맞물려 만들어내는 고인에 대한 죄책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후 우리의 마음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사례와 글쓰기를 통해 들여다보기도 했다. 개인적인 상실을 다양한 예술매체로 표현한 예술가의 활동을 들으며 각자에게 잘 맞는 애도 환경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모두가 가장 내밀한 상실의 경험을 들여다보면서도, 사회적 참사와 그에 대한 애도를 끊임없이 함께 고민했다. 국가가 선포한 애도기간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갈 애도의 공동체가 일시적으로나마 열린 것 같았다.

“제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삶을 슬픈 것으로만 몰아갔다는 걸 깨달았어요.”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경훈이 들려준 말이다. 그는 사고로 치매가 시작된 외할머니를 전담해서 3년 가까이 돌봤다. 할머니가 떠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를 떠올리는 게 어렵다.

하지만 다양한 애도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왜 지난 시간을 힘들어했는지 깨달았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임종 앞에 우왕좌왕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당혹감이 여전히 소화되지 않았기에 지난 시간이 부정적으로 느껴졌고, 할머니의 삶도 슬프게 막을 내렸다고 여기게 됐다. 할머니를 돌본 시간이 무가치하다는 판단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임종 당시의 자신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할머니의 삶을 납작하게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할머니의 삶이 있었을 사랑과 만남들, 지키며 살았을 가치들을 먼저 떠올렸다.

애도하는 그의 모습에 앞으로 내가 겪을 상실의 두려움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타인의 애도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돌봄이 생의 필연이듯, 상실과 애도도 생의 필연이다. 이제라도 혼자서 알아서 감정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애도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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